비
내리는 날 걷기 (2009/6/22)
©
Suk Hoon Han
지난
겨울 이후로 시간이 없어 운동을 게을리하다 보니 뱃살이 자꾸 불어나,
요즘 들어서는 매일같이 산자락을 거니는 운동을 했다. 그런데 토요일인
오늘은 장마의 전조인지 적지 않은 비가 내려서 산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연구실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집을 나서서 우산을 쓰고
삼십 분 정도 6차선 도로 옆을 걸었다. 이 길은 차들이 쌩쌩 달려서
시끄럽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색의 길이 아니지만, 일단 이 길을
걸어야 조용한 시골길로 접어들 수가 있다. 돈벌이의 길은 번잡하고
소란스럽지만 그 길을 걸어야 조용한 공부의 길로 접어들 수가 있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나 할까. 나는 차들이 소음을 내뿜는
거리에서는 좀체로 사색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호젓한 길에 다다를 때까지는
아주 빠른 속도로 걸었다. 짧은 바지에 얇은 셔츠 홑겹으로 입고 나왔지만
금세 몸이 더워졌다. 조용한 길로 들어서서 걷다보니 어느덧 차 소리는
사라졌다. 그 지점부터 속도를 줄여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니 수풀의 내음이 짙어졌다. 빗물을 머금어 색깔이 짙어진 아스팔트 도로
위에 진한 초록색 풀내음이 번져있다. 아스팔트 길 곳곳에 버찌
열매들이 흐드러지게 떨어져 있다. 차바퀴가 밟고 지나간 곳에는 버찌의
검붉은 물이 짙게 배어있다. 나도 길 위의 버찌들을 밟고 지나간다.
신발에 검붉은 물이 들 것 같다.
평소에 자전거를 즐겨 타지만,
걷고 있다 보니 자전거만 해도 너무 빠르다는 것을 알겠다. 천천히
걸을 때에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광경들을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는 거의
포착할 수가 없다. 하물며 차 타고 드라이브하며 다니는 여행 길에서는
그야말로 주마간산 격으로 대강의 경치밖에 볼 수가 없다. 나무와 풀이
많고 물가에 접한 지역을 천천히 걷다보면 대단히 많은 미시적(micro)
광경을 발견하게 된다. 나무 그늘 하나, 하나마다가 새로이 방문케 된 마을처럼
다가온다. 그늘 하나, 하나에 한 가지씩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때로는
그 이야기가 궁금해 걸음을 멈추고 그늘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축축한
그늘 속에서는 빗물이 똑똑 떨어지고, 나뭇잎이 살랑거린다. 그
그늘 속에는 나뭇잎과 벌레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걸음을 멈추고 경청하면 그런 이야기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 하다. 그나마 걸음을 멈춰야만 감을 잡을 수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의
나뭇 그늘은 서늘하고 매혹적이지만, 비오는 날 나무 아래의 어둑어둑한
음영에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성 싶다. 내가 나뭇 그늘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에 대한 단서를 잡은 것은 예닐곱 살 어렸을 적의 일이다.
그때에는 자그마한 마당의 크지 않은 나무들 밑에서 끝도 없는 이야기들을
봤었다. 지금은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길 한 켠에 개암나무
같아 보이는 것이 한 그루 있는데 그 가지 일부가 여름인데도 가을 잎처럼
말라버린 갈색 잎사귀들을 매달고 있다. 둥그런 갈색 나뭇잎들 십수
장이 비에 젖어 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단아했다. 그것들은 곧 가지에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갈 참으로 보였다. 죽음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곱게 늙었구나' 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
나왔다. 왜 극우 보수계층의 노인들이 추하게 보이는지 알았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짊어가고 있는 후대들에게 조용히 길을 내주고 인자한
미소로 등을 두드려주는 그런 노년을 구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침을 튀기며 후대들에게 막말과 욕설을 퍼붓고 핏대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가는 길이 고와야 하건만. 하긴 시대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지독하게 이용해먹는 우익 언론에 의해 의식이
마구 헤집어져버린 노인들이 안쓰럽기도 하다. 노년의 지혜를 나눌 수
없는 이 공동체는 그만큼 불행하다.
나는 경계한다. 내가 이른바
조·중·동에게 내 무의식의 그림자를 투사하고 있지나
않은지, 내가 그들 기득권 수호자들을 내 개인의 심리적인 작용의
희생양으로 삼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공격성을 투영하고 있지나
않은지.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형성해 가자는 젊은 지성들의 요구를
좌익이라 오도하며 기득권 수호에만 급급한 채 억지 부리는 그들이 나는 굉장히 증오스럽다.
수오지심(羞惡之心; 불의에 대한 증오심)도 고귀한 사단(四端) 중의 하나이지만,
수행자에게 증오란 대단히 껄끄러운, 또는 부적절한 듯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우익 언론에 대한 증오에 개인적 심리 기제가
담겨있지는 않은지 줄곳 살펴보고 있다. 단정지을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니지만, 심리적이기 보다는 수오지심에 가까운 듯 싶다.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개울가에 다다랐다. 비를 맞은 내가 졸졸 흐르고 있다.
내의 양 기슭에는 다양한 풀들과 갈대가 풍성하게 자라 있다. 너무도
풍성한 것이 마치 푸성귀를 잔뜩 차려놓은 밥상과도 같다. 그 풀들은 비에
젖어서 촉촉한 초록이 더 진해졌고, 그 사이에 핀 하얀 잡초꽃들이 소담스럽고
예쁘다. 그 풍성한 개울가 잡초밭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출근 길. 처자식 먹여 살리는 가장의 입장에서 세월이 갈수록 돈벌이가
쉬워지지 않아 힘겹게 살림을 꾸려나가다 보면, 때때로 내가 돈이 많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피어오를 때가 있다. 돈이 많다면 아마 지금 하는
돈 벌이 일을 그만 두고 공부와 집필에 전념할 수 있지 않을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이렇게 여유롭게 들풀 바라보며 한참 서있을
수 있는 것을 보니 내 삶은 이미 여유롭고 풍요롭다는 사실을 알겠다.
돈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작용은 적지않이 탐욕에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비닐 하우스 줄지어 있는 새마을길을 걷다보면
아담한 토란밭이 나온다. 큼지막한 토란 잎사귀가 빗물을 담고
있는 모양이 각양각색이다. 어떤 잎은 단 한 방울의 거대한 빗물을 머금고
있고, 어떤 잎은 수십 개의 작은 물방울들을 얹고 있다. 식물의 잎들도
죄다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 그것이 자연 아니겠나. 통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이 자연 아니겠나. 인간이 원래 자연의 일부였을 텐데, 그 자연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가 문명의 담장에 가로막혀 이다지도 힘겨우니, 인간이란
지구 상의 만물 중에서도 참 독특하고 개성있는 숙명을 타고 난 생명체인
것 같다.
전원 사이로 난 길의 끝에 이르니 2차선 차도와 만난다.
차들이 쌩쌩 달린다. 고요한 들길을 수십 여분 걷다 차도로 들어서니
차 지나가는 소리가 굉음이다. 정말 도저히 저 소음 속에서 고요를 찾을
수가 없다. 나의 사색은 여기에서 중단돼버렸다. 더 풀어갈 사고의 끈이
남아 있었건만. 몇 일 전의 희안한 꿈과 내 안에 남아있는 여러 가지
물욕, 그리고 그것들을 보듬고 가는 수행의 챌린지에 관해 더 성찰해야
할 거리가 남아 있었건만. 오늘은 일단 출근하고, 다음 기회에 이어가기로
한다, 성찰의 끈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