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2010/11/21)
©
Suk Hoon Han
나보다
몇 살 나이를 더 먹어 오십대에 접어든 친한 선배를 만났다. 오랜 만에
만난 선배의
초미의 관심사는 두피의 단위 면적당 모발 갯수였다. 선배는 아직(?)
모발 밀도에 큰 격변이 없는 나를 칭송해마지 않았다. 이 나이에 멀쩡한
모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래서 여전히 젊음의 희미한 흔적을
지니고 있는 나를 선배는 진심으로 찬양했는데, 사소함에 대한 그 지나친
진지함에 짜증이 난 내가 결국 버럭 쏘아 붙였다: '아니, 형은 한 인간의 가치를 모발
갯수라는 단일 기준으로만 평가하는 거요?' 라고.
다 웃자고
한 말이기는 하다. 실은 동정심 많은 그 선배는, '나도 이젠 늙었어'라며
푸념하고 있는 후배인 나를 위로해주고자 그리 말해줬을 게다.
최근 몇 해 만에 나는 팍삭 늙어 버린 것 같다. 사십대 초반에만
해도 '십 년은 젊어 보인다'는 평을 심심찮게 들었었건만, 사십 중반의
'중년의 위기'를 넘기며 인격 성숙의 도정과 경제적 생존의 노정 양쪽에서
고생을 좀 하다보니 팍 삭아버렸는가 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바보처럼
틈만 나면 산길을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 오르고, 밤 늦게 귀가해서도
헉헉거리면서 푸쉬업을 하는 등, 외면적 육체의 젊음을 놓치지 않아보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미국 저널리스트들이 80세에 이른 명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여전히 날씬하며 기품있어 보인다'며 칭송하는 것을 하나의 귀감으로
삼아, 나도 그렇게 '보이고' 싶다는 욕구를 키워온 것이다. 내가 '이
나이에' 날씬하고 멋져 보이고 싶은 욕구를 품는 것은 본질적으로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됐다.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숨길 생각도 없다.
얼마
전, 대학 캠퍼스에서 여제자와 대화 중이었는데, 그 제자의 친구가 다가오더니
나를 지칭하며 이렇게 물었다: "아빠 오셨어?"
나
스스로도 제자의 삼촌 뻘로는 규정하고 있었건만 "아빠"라니...
나의 겉 모양새의 노화 정도를 절감할 수 있었다. 내게서 이 말을 전해들은
나의 벗들은 매우 통쾌해 했다. 늘 대학가에서 젊은이들과 재미나게
놀고 있는 것만 같은 나에 대해 벗들이 그간 쌓아뒀던 질시가 분출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통쾌한 웃음도 잠시, 그들도 이내 침울함에
빠져들었다. '우리도 이제 여대생들의 아빠 뻘이 돼 버렸구나' 라는
자각이 도래했기 때문일 게다. 한 영화에서 배우 조지 클루니가 자신을
오십대로 봤다는 젊은이의 말을 듣고는 충격에 빠져, 마주치는
사람들에게마다 이렇게 묻고 다닌다: "내가 정말 오십대로 보여?"
내게도 어느 새인가 엄습해 올 것이다, 오십대라는 것이.
나의
한 부분은 노화에 저항한다. 늙는 게 싫다. 마음은 여전히 젊기 때문이다.
나는 여섯 살 때의 나의 감정과 느낌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열일곱
살 때의 나도, 스물 다섯 살 때의 나도 그대로 지금의 나 자신과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내가 늙은이가 돼가고 있다니... 자연스러운 현상인 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에 저항한다. 그래서 뛰고 운동하고,
세상의 새로운 아이디어에 늘 귀를 기울이고, 아이패드를 살까말까
고민하며, 모였다 하면 증권과 부동산 얘기나 하는 다른 늙은이들과는
어울리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나의 부분은 노화를 환영한다.
잘 늙고 싶은 것이다. 마음 속에는 여전히 소년이 있으나 그 소년과
함께 점잖게 늙어가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내 내면에서 고급 포도주처럼
지금까지 잘 숙성된 몇몇 면모들에 대해서는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다. 늙은이라고 아름답지 말라는 법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노화를
받아들인다. 이같은 나의 지혜로운 일부분은 노화에 저항하는 나의
어리석은 부분을 포용해준다. '받아들이거라, 받아들이거라.' 젊고도
늙은 것은 나의 양면성이다. 나는 그 양면성을 즐거워 한다.
참으로
오랜 만에 조용한 연구실 책상 앞에 앉아 잔잔한 드뷔시의 피아노 곡을
들으며 책을 읽었다. 책속의 지혜를 어루만지며 늦가을 오후에 쏟아지는
햇빛을 바라봤다. 안경 너머의 지혜의 활자들이 햇빛에 반짝거린다.
나즈막히 한숨을 대기 속에 뿜어내며 오랫동안 잊었던 안온감을 만끽했다.
고요와 평화. 이런 것들이 노년이 주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세상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삶은 여전히 고되지만, 홀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나
자신으로 있을 수만 있다면 나는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으리라.
그렇긴
하지만... 그냥 늙어버리기엔 아직 남아있는 젊음의 힘이 아까우니,
조금만 더 써봐야 하겠다. 어디에다 쓸까? 물론 나의 '소명'에다
써야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