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중의 단상들 (2010/10/24)
©
Suk Hoon Han
나는
학기 중에 내 마음대로 1주일 휴가를 낸다. 그 기간 동안 중간고사 채점하고,
수업과 관련해서 밀린 일들 처리하지 않으면 한 학기를 제대로 이끌어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너무 많은 수업을 맡은 데에는 내 책임 소재도
있으나, 그 또한 대학가의 구조 조정 등 여러 가지 연유로 인해
일어난 일이니 내 잘못만이라 할 수는 없다. 글세, 내 학생들은 내가
놀려고 '땡땡이' 치는 선생은 아닐 것으로 믿어주리라 믿는다.
헌데 내 욕심에는, 1주일 휴가 동안에 일만 하는 게 아니라 하루 쯤
어딘가로 혼자 바람 쐬러 다녀오고픈 마음도 있었다. 아니면 등산이라도
반나절 한다든가.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바람은 무산되고 말았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였고, 만날 사람들도 너무 많아서였다.
만남은
일요일부터 시작됐다. 여러 달동안 만나자는 콜을 계속 거절해서 미안했던
이웃 사촌들과 모처럼 만나 한 잔을 나눴다. 평소에는 월요일 새벽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일요일 한 잔은 꿈도 못 꾸지만, 이번 월요일에는
시험 감독만 하면 돼서 가능했다. 월요일에는 학교 다녀와서 열심히
일만 했으나 화요일에는 대학원 수업이 있는 신촌으로 죽마고우가 찾아와서
또 한 잔 했다. 수요일에는 술은 쉬었으나, 멘토해주는 학생의 중요한
공부를 돕다보니 늦은 밤에 귀가하게 됐다. 목요일에는 길벗님께서 멀리
수원서부터 우리 집앞까지 찾아오시어 또 한 잔을 나눴다. 금요일에는
오랫동안 못 본 벗들이 불러서 종로까지 나가서 또 한 잔을 했다―조금만
마셨지만. 이 정도면 인간관계도 좀 접어두고 조용한 주말을 보냈어야
했건만, 도저히 피치 못할 술 자리가 또 벌어지고야 말았다. 동네의
가족봉사단 모임에 그간 너무 바빠 못 나갔다가 오랜만에 참여하게 됐는데,
모처럼 단원들 사이에서 펼쳐진 술자리에서 나만 얌체처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부어라 마셔라, 엄청 마시게 됐다. 그 다음
날 일요일에는 실은 또 한 벗과 예약이 돼있었지만, 벗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주일 휴가 내서 밀린 일
다 하고 정신 좀 맑게 하려 했다가 거의 연일 술 자리를 이어가게 됐다.
비록 내가 자청하여 마시지도 않았고, 한 건, 한 건이 순수하게
'사람' 을 지향하는 술 자리였지만, 어쨌든 퍼마신 것은 나
자신, 누구를 탓할 수 없다. 시간이 없어서 만나자는 이들을 다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많은 벗과 지인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살고 있고, 아직도 만나야 하는, 아니 만나고 싶은 이들의
리스트는 꽤 길다. 그건 그렇고, 내가 이렇게 벗과 지인과 학생들에
의해 빈번히 불려다니게 된 건 사실 나로선 조금 의아한 현상이다.
이런 건 어릴 적의 나로서는 예상하기 힘든 변화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는 외골수였고, 내향적이었으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기피했었다.
사실 그런 나의 성향은 아직까지 일부분 지속돼오고 있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나의 삶은 늘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이어져가고 있다.
이런 삶속에서 사람들은 나를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대체로 누구를 만나도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만남이 이전투구의 성격을 띠지 않는 한. 내 성격이
'물'처럼 돼 버린 것도 같다. 나는 이것이 내 수행의 매우 긍정적인
성과라고 믿고 싶다. 내 수행은 죽는 날까지 자기실현을 지향하는 것이고,
따라서 품격 높은 노년 생활의 영위는 필수 이행 사항이다. 내가 인간
관계에서 원만함을 이루지 못하고는 그런 노년을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휴가 기간 즈음하여 슬픈 노인들을 몇 차례 봤다.
동네 등산로에서 개를 끌고 산에 오르던 오십대 부부에게 칠십대 노인이
시비를 걸었다, 왜 개를 끌고 오느냐고. 격분한 오십대 사내는 소리
높여 항변했고, 이에 또 흥분한 노인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오고 ...
하다보니 두 사람은 몇 십 초만에 불구대천의 원수들처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서로에게 내뱉으며 일촉즉발 상황까지 갔다. 먼 발치에
떨어져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는 칠십대 노인이 얻어맞을까봐 예의주시하고
있었다―아니, 그보다는 원래 남들 싸움 구경이 재미있는 법이니까.
동행했던 여인네가 말려서 결국 주먹다짐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허나 부부가 떠난 뒤에도 노인은 분을 삭이지 못해 계속 허공에다 쌍소리를
내뱉고 있어야 했다. 그의 분노에 가득 찬 한 마디가 기억난다: "뭐?
내가 개만도 못하다고? 아니 그럼 내가 니놈의 개새끼만도 못하다는
말이냐? 넌 에미 애비도 없냐?" 비슷한 연배인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발길을 돌리는 내 심정은 매우 씁쓸했다. 오십대 사내의 "나이를
쳐먹으려면 곱게 쳐먹어야지!"란 전형적인 대(對) 노인성 공격어도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오십대 사내와 칠십 노인 둘 다에서 나를
보았다. 아니, 내가 그리 될 수 있을 가능성을 봤다. 나도 사소한 공중
질서를 어기는 '젊은이'에게 그런 지적을 해본 경험이 있고―물론 훨씬
정중하게―, 내게 무례하게 구는 '늙은이'에게 그런 반발 행위를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물론 내 딴에는 훨씬 예의를 갖춰서. 나도 감정이
어떻게 폭발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들처럼 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또 한 번은, 전철 노약자석에 앉은 두 칠십대
남성이 술 한 잔 걸치고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씁쓸함을 맛보기도
했다. 셔츠에 타이도 매고 있는 말쑥한 신사들인 그 두 노인의 대화
주제는 '요즘 젊은 것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입은 상처였다. 그들의
말투는 등산로의 노인에 비해 훨씬 점잖았으나, 그들 내면에 담긴 분노의
정도는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좌절하고 있었다. 세상의 대접을 못
받게 된 자기 자신들에 대해 좌절하고 있었다.
나는 이 노인들에게서도
나를 보았다.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리 돼 버릴지 모르는 일이다.
세상을 젊은 것들에게 내주고 뒤안길로 내몰려, 인정도 존경도 못받는
노인, 불평 불만에 가득 찬 노인(grumpy old man)으로 늙어 버리면 어떡하겠는가.
나이가 점점 오십에 가까워지면서 이런 두려움에 실감이 더해간다. 애초에
'이렇게 살다가 갈 수는 없다'고 시작했던 수행이었기에, 십 년이 흘러도
그 성과가 미약하다면 조바심이 일기도 한다.
그래서 자위해본다.
맞아, 나는 적어도 원만해졌잖아. 남들 욕도 안하고, 세상에 대한 불평,
불만도 별로 없고, 누구하고도 즐겁게 대화하고 술 잔 나눌 수 있고.
또, 화목한 가정을 이끌고 있으며, 깊은 속내를 나눌 벗들도 많고,
게다가 나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도 있고 말야.
이런 자위는 나의
외적, 사회적 인격(페르조나)의 성장이 크게 비뚤어지지는 않았다는
자기 평가에 기반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내적 인격, 내 안의 나,
참된 자기(Self)의 성장은 어떻게 돼가고 있는가? 글세, 페르조나와
'자기' 사이의 즉, 안과 밖 사이의 팽팽하게 긴장된 관계 속에서
매일 매일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 지금 이 상태 그대로를 나는
평화롭게 받아들인다. 내가 비록 아직 완전하지 못하나, 나는 언제나
완전함을 추구할 것임을 아는 것만으로 평화로울 수 있다.
교육학
분야의 대학원 진학을 위해 내가 도와주고 있는 한 학생이 자신을 가르쳤던
교수에게 추천서를 받으러 갔다가 툇자를 맞고 왔다. 학생은 그 교수가
가르친 과목에서 A+를 받았지만, 교수는 학기가 끝난 후 연락도 한 번
않다가는 추천서 써달라고 온 것이 잘못 된 행동이라며 써주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몹시 분개했다. 제자 앞에서 '그런
X같은 자식이 교수 행세를 하고 있다구?'라는 거친 말이 튀어나오려
하는 것을 자제해야 했다. 자신을 거쳐간 학생, 그것도 우수한
점수를 받은 학생이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대학원에 진학하려는데 도움은커녕
쓴맛만 안겨준 그 교수는 과연 무슨 생각을 갖고 교육자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일까? 힘겨웠던 미국 유학 시절에 나를 연구실에 불러 앉혀놓고,
에세이 쓰는 법을 하나, 하나 꼼꼼하게 지도해주셨던 내 은사님이 떠올랐다.
그 은사님 말고도, 내게 과분한 애정을 듬뿍 쏟아부어주셨던 여러 은사님들도
떠올랐다. 나는 그분들이 너무나도 존경스럽고 아름다워, 꼭 그분들을 닮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분들과 닮아 있을까, 아니면 그
고약한 교수와 닮아 있을까? 만약에 내가 후자일 경우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내가 그럴 리는 없어, 되뇌이지만,
실은 나도 어떤 학생에게서 대단히 서운함을 느꼈던 적도 있었도, 어떤
학생을 미워한 적도 있었으며, 어떤 학생을 내쳤던 적도 있었다. 나는
그 고약한 교수에서도 나를 봤다.
남은 여생동안은 나의 자애로우셨던
은사님들만을 닮아가고 싶다. 이 세상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도 오직
사랑과 믿음만을 주는 선생이라는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내 학생들이 경험하고
갈 수 있기를 갈망한다. 나의 은사님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분들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내 안에 심어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 학생들에게
내 선한 의지를 내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인간에 대한 그런
믿음을 통해서만 나의 제자들도 세상을 개선해나갈 고귀한 의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그런 선생일 수 있을까? 그런 선생이고픈
과분한 꿈을 꿀 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신께 감사드리며, 나는 오늘도
수행의 하루를 시작한다. 인간적 원만함을 넘어서서 본래의 나를 밝히기
위한 수행을 이어간다. 부단한 수행없이 진짜 선생 되기는 불가능한
것 같다, 적어도 나로서는. 철저하게 긴장하고 늙어가련다. 묘하게도
고요와 평화는 그런 긴장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