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2010/10/10)
©
Suk Hoon Han
이른바
'행복 전도사'라는 별명을 가졌던 유명인사가 자살을 했다. 지병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으나 세간에는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다. 타인의 삶을
제3자가 평가한다는 것은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 일인가? 그저
고인이 된 이들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 다만 차제에, 행복에 관한 단상이나
조금 끄적여 본다.
인생에서 성공과 행복만을 외치는 것은 삶에
대한 편향된 접근이고, 그래서 불완전하며, 따라서 일종의 오류이다.
내가 삶에서 자기실현의 궁극적 중요성을 주장하면, 어떤 젊은 학생들은 마치
내가 성공과 행복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삶의 상수(常數)인 실패와 좌절이나 불행까지도 감싸안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자 행복이라고 본다. 자기실현이란 내면의 빛만 부각시키자는
게 아니라,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온전한 나를 직시하고, 나아가 빛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넓혀보려는 삶을 사는 것이리라. 나아가 내가 빛으로
향할 수 있도록, 또는 '검은
소를 하얗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 어둠과 불행과 실패도 사랑할 수 있을 때, 자기실현은 높은 경지에
올라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나 자신이 그 경지에 올랐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밝기만 한 행복론이나 오로지 낙관적이기만
한 조엘
오스틴 류의 성공론에
나는 찬동하지 않는다―텔레비전에서 그의 설교를 직접 듣고난
후, 그에 대해서 더 비판적이 됐다.
삶에는 반드시
어둠이 있고, 불행이 있고, 실패가 있다. 이것들 없이 빛과 행복과 성공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이 후자를 원하는 것이 아무리 당연하다 해도, 전자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며 살 수는 없다. 실로 전자들은 후자들보다도 훨씬
더 자주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는 어둠과 불행과 실패를
끌어안을 수 있어야만 제대로 살아갈 수가 있다. 나는 나의 어둠을 사랑할
수 있는가? 나는 내게 닥친 불행에 감사할 수 있는가? 나는 나를 무릎
꿇린 실패 앞에 의연할 수 있는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또는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런 것들을 조금씩 배워나가는 과정인 것 같다.
나는
나의 어둠을 사랑한다고까지는 말 못할지 몰라도, 나의 어둠을 인정하고,
나아가 증오하지 않을 수는 있다. 일례로, 나의 내면의 매우 이기적인
또 하나의 인격체인 '내면 아이'는 어린 시절에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탐욕스럽고도 파괴적인 욕망을 세상에다 뿜어내려
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그 내면 아이와 화해를 구하면서 그 아이를
달래고 설득시켜온 과정을 통해 내면의 어둠을 토닥여주는 법을 조금씩 배우게
됐다. 그런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세월에 감사한다. 내 안에 어둠이 없었더라면
그런 것을 아예 배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 안의 어둠과 대화함으로써
나는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훨씬 더 관대해졌고, 이해심도 깊어졌다고
스스로 믿는다. 예전 같으면 강력한 증오심을 투사하여 공격하고 싶었을
대상도 최소한 그렇게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참고: 내면
아이는
동시에 내 의식 깊은 곳의 창의적 불꽃을 피워주기도 하는 등, 긍정적
측면도 많이 지니고 있으므로 가능하면 즐겁게 뛰놀 수 있도록 잘 돌봐줘야
내 심리적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내게 닥친 불행이 일으키는 초기의 통증에 신음할 때도 있으나,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불행이 내 긴 삶의 여정에서 행사할 궁극적인
영향을 상상해보며 감사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또한 나는 나를
좌절케 한 실패 앞에서 때로는 모멸감에 몸을 떨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런 실패가 없다면 더 자라날 나의 면모를 발견할 수도 없었을 것임을,
그래서 수행에 진전이 없었을 것임을 깨달아 서서히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나이를 먹으며 조금씩 터득해온 것들이다. 또는
수행 덕분에 배울 수 있게 된 것들이다.
그런데 어둠을 수용하는
것이 꼭 필요하긴 하나, 그러다가 어둠에 압도돼버리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두운 그림자의 골이 너무 깊으면 그것에 압도될 수도 있다. 어둠의
골이 깊어지는 것은 대체로 욕심 때문이다. 물욕, 애욕 등, 무언가를,
누군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이 어둠의 힘을 키워준다. 따라서 욕심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물욕을 어느 정도 넘어서도 애욕이란 게 남아
있다. 타인을 소유하고 싶어하거나, 타인의 애정을 바라거나, 타인에게
과도한 애정을 투사하는 것 등등이 다 애욕의 소산이다. 어둠과의 화해를
구하는 수행의 길에서 이러한 애욕에 대한 경계는 필수적이겠다. 그래서
나는 첫째, 타인에게서 애정을 받을 것을 아예 기대를 하지
않으려 하며, 둘째, 타인에게 지나친 애정을 퍼붓지 않으려 한다.
이는
방어기제가 아니라 중용의
태도이다. 그리 판정할 수 있는 이유는, 방어기제가 나의 관대함을 축소시키는
데 반해 중용은 관대함을 증대시키는데, 내가 타인의 애정을 기대하지
않거나 또는 타인에게 주고픈 애정도 절제할 때 내 마음이 매우
관대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게서 물적이든 심적이든
도움을 받은 이가 그러한 '은공에 보답'할 것 따위는 아예
기대도 하지 않고, 그저 나중에 그가 '발등 찍는 믿는 도끼'나
되지 않게 해주십사 관세음보살께 기원이나 하는 정도다. 내 도움을
받은 이들 중에는 나의 이런 식의 차가운 말을 듣고 섭섭해
하는 경우도 있으나, 나는 그들을 나에게 묶어두지 않으려는 것이고,
그들이 자유롭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것은 관대함을 수반하므로 방어기제가
아니라 중용의 태도이다.
또, 나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퍼붓는 것을 경계하여, 내 딸들에게도 어떤 면에서 엄격한
태도를 견지한다―딸들이 독립적인 성인으로 자라날 것을 기대한다든지,
내가 늙고 병들면 나 홀로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라든지 등등.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다, 심지어는 사랑을 주고 받음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물론 신의
본성인 사랑에 무슨 과함 같은 게 있겠는가만은, 그러한 사랑마저도
현상계에서 전달되는 방식에는 과함이 묻어날 수 있고, 이는 사랑을
전하는 주체가 육체적 집착을 지닌 자아이기 때문이다. '다정도
병인 양 하여' 과한 애정은 필히 상대를 속박하기 마련인 법, 나는 딸들마저도
'지나치게' 사랑하려 하지 않는다. 이도 관대함을 수반하므로 방어기제가
아니라 중용의 태도이다.
나의 욕심을 절제할 수 있을 때, 내
마음속의 어둠의 골은 줄어들고 옅어져서 내면의 빛이 어둠을 포용하기가
수월해진다. 이를 잘 알고는 있으나, 나는 아직 욕심의 뿌리를
뽑아버리지 못했다. 그렇긴 해도, 욕심이 이 시·공간을 천국으로도
만들고, 지옥으로도 만들 수 있음을 기억해내며, 보다 높은 나, 욕심
위의 나, 어둠을 끌어 안은 나에 대한 상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천국이란
어둠과 불행과 실패가 없는 곳이 아니라, 그것들을 다 수용함과 동시에 그것들을
뛰어넘은 곳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