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2010/10/3)
©
Suk Hoon Han
잊을
만 하면 나오는 꿈 얘기 한 편.
꿈에서 내가
한 제자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제자는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고, 나와
비슷한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청년으로, 내가 그 나이 때 입었던 것과
다소 유사하나 좀더 음울한 색조의 양복 저고리를 입고 있다. 그는 무표정하지만
나에 대한 깊은 충성심을 갖고 있다. 매우 내향적이고 조용한 청년이다.
내가 그에게 농담처럼 이런 말을 건넸다. "사람의 배가 칼에 찔리면
그 느낌이 진짜로 어떨지 궁금하다." 그러자 제자는 "그 느낌이
어떨지 알아오겠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하고는 길 저편으로 한 걸음에
내달리더니,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행인 한 명의 배를 다짜고짜 찌르는
것이었다. 칼에 찔린 통통한 체구의 중년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고꾸라졌고,
제자는 칼을 더더욱 깊게 쑤셔넣었다. 나는 '사람의 배를 칼이 찌르는
그 느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통증과는 다른 형언키 힘든
느낌이었다.
아무튼 순간적으로 일어난 엽기적인 사태에 화들짝
놀란 나는 쓰러진 사내에게 달려가 제자의 칼을 쥔 손을 잡아 뺐으나
사내는 이미 숨진 뒤였다. 나는 매우 당황하여 제자를 책망했다. 그러나
제자는 표정이 밝았고, 나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었음을 기뻐하는 듯
했다. 나는 매우 갈등하고 있었다―제자를 도망치게 할 것인지, 경찰에
자수하게 할 것인지에 관해. 내가 어쩔 줄 모르며 갈등하고 있는 사이에
이미 경찰차가 사고 현장에 도착했고, 경찰들이 제자의 양팔을 붙들고
체포해갔다. 그들에게 끌려가면서도 제자는 나를 향해 밝은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애초에 제자에게 그런 말을 농담처럼 건넸던 것에 대해
후회막급하면서도 제자가 걱정돼서 경찰들에게 매달려 소리질렀다, 내
제자가 이럴 사람이 아닌데 순간적으로 이런 사고가 일어난 것이니 용서해달라고.
하지만 경찰을 막을 수는 없었고, 나는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도움을
줄 지인들을
찾으러 나섰다. 지인들은 모두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들이었고,
나는 그들에게 자초지정을 털어놓고 제자를 구명할 방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속세에 묻힌 도인들'처럼 느껴졌다.
여기까지가 기억나는 줄거리다. 말도 안되는 살인
사건 빼고는, 꿈답지 않게 논리적이고도 일관성 있는 이야기 전개가 특이하다.
제자는 나를 닮고 싶어하는 실제 나의 제자일런지, 아니면 젊은 시절
나의 변형일런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문제의 발단은 나의 인식 욕구에 있었다. 그런데 그 인식 욕구를 나는
대수롭지 않게 농담처럼 여겼고, 그것은 결국 치명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대체 어떤 인식 욕구가 그다지도 위험한 것일까? 무엇을
알고자 할 때 사람은 타인을 파괴시킬 수도 있는 것일까? 꿈에서는 제자와
행인 두 명이 비극적 파국을 맞지 않았는가.
복부를 칼이 깊숙이
찔러 들어오는 느낌이라는 것은 혹시 무의식 저 깊은 곳의 자기(Self),
신과 맞닿은 그 영역 속으로 쑤시고 들어가보고 싶은 욕구를 나타내는
건 아닐까? 수행을 여러 해 이어나가다보면 깊은 인식에 대한 욕구가
피어오르기도 한다.
표면 의식, 또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자신의
자아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질리고, 표면의 안쪽 깊숙한 곳에서
희미하게, 그러나 간절히 들려오는 내면의 음성을 포착하게 된 이는
사회가 기대하는 바인 자신의 가면(페르조나)을 떨치고 무의식의
늪에 잠긴 내면으로의 위험한 여행에 나서게 된다. 그 여행은 우주와
사물에 대해 질문하는 인식과 더불어 세상 속의 한 점을 점유하는 존재로서의
삶의 방식인 수행을 동반하게 된다―물론 인식과 수행은 불가분의 관계다.
이 여행에서 내가 던진 어떤 질문이, 어떤 인식 욕구가 타인을 파멸로
몰아갈 수 있을만큼 위험한 것일까? 만약에 그런 위험 소지를 안고 있는
질문이 있다면, 그것을 가볍게 농담처럼 타인에게 누설해서는 안된다는
경고가 그 꿈에 담겨있는 것일까? 그런 비밀스러운 의문을 특히 나를
따르는 제자와 같은 이들과 나눠서는 안된다는 경고가 담겨있는 건 아닐까?
여기까지 추리해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수행의 여정에는
언어로 담기 힘들고, 타인과 공유하기 어려운 깊은 인식의 욕구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나 스스로도 평소에 쉽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함부로 내 언설을 통해 삐져나올지도 모르는 '위험한' 인식 욕구에 대해
마음을 집중하여 경계할 것을 내 내면의 신께서 알려주신 것은 아닐까?
당분간 말을 삼가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