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 때부터 타인의 명령이나 당위론을 싫어했던 나는 항상 윤리관이 유연하거나 희미했다. 그건 윤리라는 것이, 내가 아직 충분히 살아서 경험해보지 못한 사안들에 대한 타인들의 가치관 셋트에 불과하고, 사회는 아직 나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그 불확정한 가치관들을 나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비윤리적인 행위를 일삼았다고는 여기지 않으나, 그 역시 사회의 윤리관에 내가 동의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의 내면의 양심에 귀기울이기 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나는 오만했다.

그런 내가 거부할 수 없었던 도덕적 명령이 하나 있었으니, 칸트의 정언명령 중,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부분이 그것이었다. 이 정언명령은 내가 경원시했던 고루한 사회의 권위주의적 당위와 달리, 나로 하여금―즉, 내가 주인이 되어― 한 번 사람을 목적이거나 수단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했었고, 그 결과 내가 이르게 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필연적인 논리 귀결에 따르라는 가이드라인과도 같았다. 그래서 이 정언명령을 이십대 이후 마음속에 품고 살아왔다. 물론, 그 명령을 까맣게 잊고 사람을 수단으로만 대했던 적이 몇 번이었던가를 헤아리기보다는―불가능함―, 그 명령을 기억해서 내가 사람을 목적으로 대했던 적이 몇 번이었던가를 세보는 일이 비할 나위 없이 쉽겠다.

사람이 목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침범할 수 없는 존엄성에 대한 자각을 내게 아마도 최초로 심어줬던 것 같다. 허나 그렇다 하여 사람이 수단일 수 없다는 말에 내가 동의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타인들을 수단으로써만 대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보다 더 자식을 사랑한다는 부모조차도 자식 그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기보다는, 부모 자신의 정신적, 심리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이런 나에게 목적으로 대해야만 할 고귀한 존재로서 인간을 이해한다는 말씀은 성스러운 계시와도 비슷했다. 육체와 욕망의 단순 상호작용에 구속돼있던 숙명적 찌질이인 나를 구원해줄 빛 같은 것이 그 안에 담겨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나의 삶은 언제나 나를 배반하여, 나는 언제나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며 계속 살아갔지만, 이십대 초반부터는 사람을 목적으로 대할 그 엄청난 가능성에 대한 꿈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아는 나의 초월을 뜻했다.

정언명령을 거의 늘 위반하며 살아왔음에도 그것을 버릴 수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 '말씀'이 내 마음 안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단서라고 믿는다. 그래서 거의 삼십 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그간의 여정을 돌아보며 할 수 있는 말은, 이제는 가끔이나마 내가 타인을 목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리 하고 있는 순간,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내가 타인을 목적으로 대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서 있는 순간, 그리고 내가 그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신께서 내게 선사한 어마어마한 은총을 온 존재로서 느낄 수가 있다. 나는 나의 최상의 발현 가능성을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나의 '있음'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존재론적 자각이 나의 도덕적 선행에 앞선다고 믿는다.

물론 나는 지금도 사람을 나의 목적에 기여하는 수단으로써 대한다. 수도 파이프가 고장나서 수리공을 불렀을 때, 그 수리공을 위하여 그와 만난 것이 아니다. 분명히 나의 생활의 편의 도모를 위해 그와 만난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표피 인식의 명백한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나와 수리공과의 만남은 그를 위한 만남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왜냐하면 단순히 따져봐도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가졌고, 그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와 나의 일견 단순해보이는 조우 안에 나의 상상을 벗어나는 심오한 의미가 숨어 있었을지 내가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표피 의식에서 의도했건 안했건 간에, 나와 그 수리공과의 만남은 그의 존재론적 목적에 기여하는 사건이었을 수 있다. 따라서 나와 타인과의 만남이 순수한 나의 이기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써만 기능하는지의 여부는 나의 제한된 단견으로 성급하게 결론지을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형성됐다: 혹시 정언명령은 당위 이전에 사실에 대한 묘사인 것은 아닐까? 즉, 우리는 실은 언제나 타인을 목적으로 대해 왔지만, 우리 스스로는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이는 내가 이해한 칸트를 위배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질문을 칸트 너머의 근원적 인간관과 이성 너머의 영성의 맥락에서 건드려 본다. 내가 영성에 개념적으로―또 존재론적으로도― 눈 뜨던 시절에 탐독했던 '신과 나눈 이야기'에는 '모든 이가 천사이고 모든 순간이 축복'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사회경제적이거나 심리적인 시각이 아니라, 나의 시·공간적 전 존재를 몽땅 포괄하는 영적인 시각의 작동이 가능하다고 가정할 때, 그러한 영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세상의 모든 이들이 나와 목적으로서 조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들은 모두가, 모든 순간에 나의 영혼의 진화에 도움을 주기 위해 나와 마주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이들의 영적인 진화를 돕기 위해 모든 이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인 시각에서는 칸트의 정언명령이 당위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리 하고 있는 사실의 묘사가 된다. 또는 이미 우리가 그리 존재하고 있는 상태의 묘사가 된다. (영적인 차원에서는 우리 내면의 신성이 이미 꽃피었다는 말이고, 우리는 이미 다 깨달은 존재들이라는 말과도 같다―다만 그 진리를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혹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고귀한 존재인 것이 아닐까.

'상아탑'은 칸트의 논증에 '신과 나눈 이야기'를 끼워 넣는 이러한 '이야기' 방식을 수용하지 않지만, 내 주변의 용감한 길벗님들 중에는 그같은 시도를 감행하는 분들이 있다. 학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그분들을 좇으려고 한다. 그래서 오늘도 만나게 될 그 누군가를 목적으로 대하고 있는 영적인 나를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고 신께 기도를 드리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