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기

초심을 유지하고 있을 때 나는 지상의 성자 흉내를 냈었다.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타인을 줬다. 그것이, 그렇게 선한 나로서 사는 것이 신의 뜻을 구현하는 것이리라 믿었다. 십년이 지난 지금 나는 더 이상 그리 하지 않고 있다. 내키지 않는 건 뱉고, 단 것을 스스로 취한다. 생긴대로 살아야 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헌데 생긴대로의 모습을 윤색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고, 본래의 자기대로 사는 것이 정신심리학적으로는 현명한 일이긴 하나, 거기에도 하나의 문제가 숨어 있었다. 나 자신의 온전한 건강만을 구하다보니 초심의 시기에 품었던 이타적인 의지가 무뎌진 것이다. 별로 남들을 위해 봉사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양보하지도 않고, 특별히 자선을 베풀지도 않고, 아무튼 그저 제것이나 잘 챙기며 저 혼자 '잘' 살고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나와 가까운 이들과 나의 학생들에게는 내가 여전히 이타적으로 대하고 있다고 스스로는 확신한다. 그러나 옷깃을 스치듯 조우하게 되는 세상의 불특정 다수에게는 그다지 이타심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나의 내면의 상태는 이 웹싸이트의 '미담' 쎅션의 변화에 잘 반영돼있다고 본다. 예전에는 열심히 찾아서 올리던 세상의 미담들을 이즈음 들어서는 별로 찾아보지도 않게 됐다. 재작년엔 아예 한 편도 올린 기사가 없고, 작년엔 어쩌다 한 편 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올해는 아직까지 전무했다. 그렇게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던 차에, 얼마 전 한 길벗님께서 보내준 놀라운 이야기를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구구, 나는 맨날 이렇게 뺀뺀 놀러다니며 제 새끼, 제 학생이나 챙기기에 급급하고 있었는데...' 나를 부끄럽게 만든 그 이야기를 이번 주 업데이트로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우리 안의 위대해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기억을 폭발적으로 까발려준 쾌거를 한 꼬마 아이가 저질렀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다. 그 아이의 놀라운 이야기를 읽고 스스로 부끄러워 하며 나 자신의 알량한 '온전한 심적 건강' 추구에 대해 자문해보기 시작했다. 여기에 길벗님께서 덧붙여준 지혜로운 '해설'을 가져다 놓는 편이 낫겠다:

제가 그 게시물을 보기 며칠 전에 우연히 케이블 채널에서 '인간의 두 얼굴'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되었습니다. 그 중 3부에 해당한 것이 '평범한 영웅'이라는 주제의 내용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홈페이지 '미담'섹션에 있는, 이수현씨의 추모집을 읽고 며칠 뒤 지하철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했던 '야마모토 이사오'씨의 사례도 나오는데요. 이처럼 타인의 이타적인 행동을 계속 접하게 된다면 이를 머리가 기억하게 되어 본인이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보다 더 쉽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 이것이 아무리 단순하고 소박한 이론 같아도, 모방을 통해서 온갖 지적 확장을 거듭해온 생물체인 우리 인간들은 위대한 본보기를 보고 느껴야만 큰 자극을 받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교육철학 강의할 때 루소의 사상을 분석하며, 이기적인 에고를 뛰어넘는 영웅적인 '인간상'을 상실해버린 것이 현대의 맹점이라고 떠들어 왔건만, 실은 나 스스로도 그런 영웅, 또는 본보기를 찾거나, 또는 스스로 지향하는 일을 홀대해왔던 것이다.

초심에 기고만장해 있을 때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법' 세 가지를 직관처럼 한 순간에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하수가 계몽이고, 둘째 수가 본보기가 되는 것, 그리고 가장 고수가 타인을 섬기는 것이었다. 위의 길벗님의 해설은 둘째와 셋째 수를 다 아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세상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는 본보기가 되는 것을 옹호함과 동시에, 그 본보기가 되는 것이 바로 타인을 섬김으로써 일어난 일이기도 하므로. 나는 평소에 강의에서 주로 가장 수준 낮은 방식인 계몽에 의존해왔다고 할 수 있겠다―물론 학생의 자발적, 주도적 지성 발휘를 촉구하는, 다소 수준 높은 계몽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계몽'에만 주로 의존해오다 보니 내 수행의 추구는 지적인 쪽으로 자꾸만 경도돼 왔고, 그러다보니 내 몸을 직접 움직이는 실천(praxis) 차원의 '본보기 되기'는 망각하고 있었던 게다.

다시금 위대한 본보기를 구하러 나서야겠다. 아, 그러고 보니, 과거에 간디가 내게는 그런 영웅상이었는데, 그동안 분석 심리학 등을 통해 인간 내면의 복잡다단한 차원들에 관해 지속적으로 따져오다 보니, 간디 위에 빛나던 그 '아우라' 마저도 내눈엔 시원찮게 보이게 돼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현상이 인간 이해에 대한 심도를 더해 줬다는 점은 환영할 만한 바이지만, 그로 인해 나와 타인들 안의 숭고함, 또는 순수함을 간과하게 된 점은 경계해야 할 바라는 생각이 든다―물론 이는 분석 심리학의 과오가 아니라, 나 개인의 실책일 뿐이다.

내일부터 신학기가 시작이다. 이 글로써 나 자신을 다잡고 학생들에게 다가갈 준비를 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