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201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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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지난 토요일 밤에 모처럼 길벗님을
만나서 생맥주와 치킨을 먹었다. 이 콤비네이션은 술과 안주 계의 고전적인 찰떡궁합, 마침 시장했던 터라 나는 치킨 뼈까지 갉아먹으며 맥주도 잔뜩
마셨다. 추석 연휴의 막장에 흐트러지고 싶었다―술은 수행으로 인해 긴장해 있던 나로 하여금 흐트러질 수 있게 해줘서 좋다―허나 취할 만큼
마시지도 않았다. 헌데 일요일 오후에는 연구실에 얌전히 앉아 있는데 벗이 찾아왔다. 벗은 닭고기가 먹고 싶다며 사들고 온 치킨과 캔맥주를 연구실
탁자 위에 풀어 놨다. 난 할 일이 많아 캔맥주를 많이 마실 수 없었지만, 치킨은 또 다시 몇 조각 씹어 먹었다. 맥주를 다 비운 벗이 돌아간
뒤, 정신을 추스리고 공부 좀 하려 하고 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 거리로 치킨을 배달시켜놨는데, 집에 맥주가 없으니 어쩔까 하는
아내의 문의 전화였다. 이로써 나는 거의 세끼 연속 치킨과 맥주를 먹어주게 됐다. 제 아무리 고전적인 찰떡궁합, 황금의 콤비네이션이라지만,
드디어 집에서 만 하룻 사이에 세 번째의 치킨 조각을 뜯을 때, 아, 더는 못 먹겠다는 탄식이 삐져나왔다. 결국 치킨+맥주 3차에서는 닭 다리
하나도 못 뜯고 나가 떨어졌다. 나는 치킨을 매우 좋아했다. 특히 시원한 맥주와 함께 뜯는 치킨을. 헌데 그것도 세 번을 잇따라 먹으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조차 않는다. 좋은 것에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질린다.
이는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한 것
같다. 나는 타인들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가지 않는다. 너무 끈끈한 우정이나 뜨거운 애정 같은 것을 기피한다. 이런 나의 성향이 인간관계에서
상처받기 싫어하는 나약한 심리적 방어기제일지, 아니면 과도함을 경계하는 성숙한 중용의 태도일지 곰곰히 따져본다. 내가 항상 이러했던가? 그렇지
않다. 어렸을 때, 젊었을 때엔 그렇지 않았다. 사회적 윤리감각이 미발달했던 유년기에는 제일 좋아하는 친구 녀석의 생일 선물을 사주려고 어머니의
돈을 훔쳤는데, 너무 많은 선물을 사주는 바람에 발각이 돼서 어머니에게 경을 친 적이 있다. 청년기에 풋사랑에 빠졌을 때에는 내 현실적 이득을
다 포기하고 한 여자만 바라봤던 적도 있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연구실 마룻 바닥에 서산으로 지는
눈부신 햇살이 드리워졌을 때, 뭔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게 눈에 띈다. 다가가 봤더니 바로 하얗게 센 내 머리카락이다. 그래, 난 늙어버린 게다.
몸이 늙은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마음도 늙어버렸을까? 그래서 한 마디로 기력이 쇠진하여 너무 많은 애정을 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일까,
아니면 마음의 기력은 여전히 팔팔하지만 중용의 미덕을 익혀서 적정 수준의 애정을 고루 나눌 수 있게 된 것일까? 물론 나는―나의
의식은― 후자라고 평가하고 싶다. 일례로, 나 자신보다 더 중히 여기는 딸들에게조차도 과도한 애정이 자유를 옥죄는 구속이 될까 두려워 스스로를
자제하려 하는데, 이는 중용의 자세에 가까울 것 같다. 단, 결론적 평가를 유보하는 이유는 무의식 때문이다. 나의 '내면 아이'의 의견을 제대로
못 들었기 때문이다. 내면 아이는 언제나 흔쾌히 나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아니어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좀 시간이 걸릴 듯
싶다.
허나 이런 상상도
해본다. 좋아하던 치킨과 맥주를 세 번 연속 들이대서 나를 질리게 만듦으로써, 신께서는 내게 과도한 애정의 투자의 폐해를 알려주시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심지어는 가족에 대해서도 애정이 과하면 좋지 않겠거늘, 하물며 그밖의 인간관계에서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