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의무 (2010/7/4)
©
Suk Hoon Han
1.
행복의 쇠락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다들 '그냥' 산다고 한다.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니까, 주어진 직분이
있으니까, 죽지 못하니까, 인생이란 원래 그저 그런 거니까 라며.
"하지만
당신 앞에 펼쳐진 놀~라운 신의 은총을 느껴보세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으세요!"
라고 호들갑을 떨며 그들의 기를 살려줄만큼 내가 친절한 인간은 못된다.
그냥 묵묵히 듣고만 있는다. 그런데 그 불행한 이들 중의 누군가는 이따금씩
삶의 불행함에 대해서 나의 동의를 구하기도 한다. "그렇죠?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닌가요?" 그때서야 나는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난 잘 모르겠는데요, 나는 매일 매일이 재밌어요."
나의
이런 말을 들은 이가 나와 가까운 사이일 경우에는, '그래, 넌 좋겠다,
니 똥 굵다' 정도의 표정을 짓지만, 그렇지 않은 이의 경우에는 대개
혼란스럽다거나 놀랍다는 투의 표정을 짓는다―대체 이 지구상의 한
인간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 왜 혼란스러운 일이어야 하는지.
심한 경우에는, '생즉 불행'이라는 좌중의 중론에 동조해주지 않고
혼자 재밌게 산다는 나를 노골적으로 싫어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십년 째 나의 하루, 하루가 은총이고, 아침부터 밤까지
내가 하는 행위들이 신나면서도 의미있는 일들이라고 느끼며 행복하게
살아오고 있는 것을. 이건, 내가 늘 즐겁고 기분 좋은 상태에만
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나도 누구나와 똑같이 기분 상하고, 슬프고,
화나고, 좌절스러운 경우와 조우하며 살아간다. 다만 나는 그 모든 부정적인
경우들을 의미있는 사건으로 재해석하려 시도하고, 일견 '불행'해보이는
날의 유용성을 밝혀내려 할 따름이다―대개는 실패로 끝나지만. 그리고
불행해보이지 않는 나머지 날들은 죄다 행복하다. 아무 일 안일어나는 날도
행복하다. 지난 십 년간 나에겐 불행해보이는 날들도 꽤 있었지만, 단
하루도 무미건조하거나 지루한 날이 있었던가 기억해낼 수가 없다. 인생의
常數인 '고해'를 겪는 때에는 물론 삶이 일시적으로 불행하게
느껴지나, 그렇지 않은 나머지 삶의 순간에는 항상 행복하다.
나에게
불행을 토로하는 이들이 헐벗고 궁핍한 사회 소외계층이 아니다. 대부분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한 이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고, 대부분 나보다
돈도 잘 버는 이들이다. 의식주 수준의 낮은 욕구가 아무리 충족돼봤자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지는 않다는 매즐로우의 도식은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 것만 같다.
2. 변환하는 행복
내가
행복을 삶의 당연함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된 본격적 계기는 10여
년 전의 신비 체험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복(至福)을 체험해보니 삶에
행복이 있음을 알겠더라. 그래서 모든 현재(present)를 신의 선물(present)로
믿으며 열심히 살다보니, 그 길에 비록 고통과 좌절도 있었으나
전반적인 삶이 행복하다고 느끼게 됐다. 이 때가 내가 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한 초기였는데,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외치는 젊은
선생에게서―그 땐 제법 젊어 보였다고들 함 (ㅜ
ㅜ)―
꽤 많은 대학생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감지하게 됐다. 그래서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행복은 선생인 나의 의무다. 내가 행복하게
삶으로써 '메시지'의 증거로서 존재해야만 많은 젊은이들이 메시지를
받아갈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은, 한 마디로 너무 오만했다.
나는 아직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자신이 행복의 증거여야만 한다고
믿었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중증 '자뻑'이었다.
나는 마치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 나오는
열정적인 예수회 신부와도 같이, 이 땅에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자신의
빛나는 영광을 위하여 순교라도 할 기세였다. 내 안의 '빛'만 바라보고
살았다. 이 하찮은 존재인 내가 빛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황홀했던지.
그래서 내 안의 '어둠'을 보지 못했다. 이윽고 의식으로부터
소외됐던 어둠이 자신의 실체를 보여주자 나의 자신만만함은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런 저런 세월이 십여 년 흘렀다. 내면의 빛과 어둠
사이의 쉽지 않은 화해를 구하며 하루, 하루를 수행하고 있다. 내
안의 '빛'에 대해 자신하지 않는 것은 나의 습관이 돼버렸다. 내 안의
어둠은 지속적인 모니터링 대상이다. 예전보다 더 신중해졌고, 겸허해졌다고
믿는다. 비록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메시지 전달'과 같은
오만한 개념은 더 이상 차용하지 않고 있으나, 소박한 차원에서 작은
메시지나마 전해보려는 꿈틀거림은 유지하고 산다. 그렇게 꼼지락거리고
있는 나의 삶은 행복하다.
아침 6시 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가방 챙겨서 나가는 출근 길부터 즐겁다. 만원 버스, 만원 전철 피하려고
일찌감치 집을 나서면 신선한 아침 공기도 마시고, 편안히 자리에 앉아
학교까지 갈 수 있다. 전철 좌석에 앉아 조금 졸기도 하고, 책을 몇
장 읽기도 하고, 또는 기도를 하기도 한다. 캠퍼스에 들어서서는 성하(盛夏)의
푸른 초목들 사이로 천천히 걸으며 대지의 신의 기운을 느껴보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강사실은 온전히 내 몫이다. 천이백원 짜리
김밥으로 아침을 때우며 메일을 확인하거나 수업 준비를 한다. 그렇게
시작한 하루, 충실하게 준비된 수업은 늘 즐겁고, 학생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해맑다. 이즈음 들어서는 학생과의 상담/멘토링 약속이 거의
하루 걸러 한 번씩 잡혔고, 젊고 순수한 그들에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게 주어진 삶에 대해 감사할 수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공부하는 모든 것이 다 즐겁다. 그 모든 게 하나의
통일된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딱 하나, 내가 신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만의 존재의 꽃을 활짝 피워야 한다는 그 메시지를.
메시지를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만, 나는 그밖의
할 일들이 많아 공부의 속도가 느리다. 가족을 돌봐야 하고, 만날 사람들도
많으며, 술자리도 종종 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삼갔지만, 이번
학기에는 여제자들과도 세 번이나 술을 (조금씩) 마셨다. 횟수가 늘어나다
보니 뻔뻔해져서 그런 게 문제 소지라는 생각도 아예 안 들고
하여, '여제자와 음주 금지'라는 해묵은 규칙도 내다 버렸다. 연구실로
찾아오겠다는 제자들도 만나야 하고, 이어지는 상담 메일에도 답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이 즐겁다. 내가 타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믿음이 행복의 주된 조건이라고 믿게 됐다.
3. 행복의
방법
행복한 삶을 영위한 것으로 유명했던 한 미국인 유명인사가
만년에 이렀을 때 사람들이 행복의 비결을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발견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축하하라."
나도
그렇게 살려고 하고 있다. 늘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 하고, 그러다 보면
실제로 발견한다. 나의 내면의 새로운 면모, 내가 만나는
이의 성격의 또 다른 부분, 집 앞 길가 메타세쿼이아 나무에 새로 뻗어난
가지, 지난 해보다 더 발전한 내 딸의 지성,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의 새로운 페이지, 처음으로 학생들에게 던져보는 참신한 사례, 검증되지
않은 발상에 대해 제자와 나누는 예측불허의 대화, 어젯 밤 깨달은 것을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 시도해보는 설명의 어휘, 문득 떠오른 간밤의
꿈속 장면 하나, 꿈속의 상징을 해석하며 맛보는 색다른 감정, 처음으로
피아노로 풀어보는 새로운 카덴자, 한 번도 떠올려보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 줄거리, 교육을 다시 이해하기 위한 철학적 신개념, 그리고
신에 대한 그리움을 담을 새로운 문장...
사랑하기는 발견하기보다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비록 그것이 우리의 본질임을 계시와
체험으로 알고는 있지만. 내가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이를 사랑한다고
결코 말할 수 없고, 한 학기 만나고 헤어지는 학생들 모두를 사랑한다고도
말할 수 없으나, 내 주변에서 지속적 관계를 맺고 상호신뢰하는 소중한
사람들 모두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단지 내 능력이
달려 충분히 사랑을 행동으로 전해주지 못하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나는
아직 수행이 짧아 추상적인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매일 아침 내 주변의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한 명, 한 명씩
호명하며 축복의 기도를 드린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 명단이 너무
길어져서 기도에 시간이 오래 소요된다. 바쁠 때엔 주문 외듯이 고속으로 그들
이름을 읊조리며 기도 드린다.
이렇게 늘 발견하고 사랑하다
보면 삶을 축하하지 않을 수 없다. 자축하고, 웃고, 나누고, 건배하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발견하고,
사랑하고, 축하할 수 있기 위한 선결 과제가 있었다. 이게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그 첫째는 소명을 찾는 것, 둘째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첫째는 달성했으나, 둘째는 진행 중이다. 소명(calling)을 찾으면 자신을
바칠 일이 생긴다. 그리고 그 일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이고, 자신의
'존재론적 욕망'을 실현해주는 일이다. 소명으로 주어진 일을 하고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그것은 궁극의 자기실현을 향하여 뻗어있는, 제대로
뚫린 길이다. (단, 그것을 찾는 것이 내 경우에는 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열리기 시작했던 바, '실용적'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 그밖의 다른
방식들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나 정리해오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소명을 받듬과 동시에 욕심도 제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어떻게 그리
할 수 있을까? 먼저 욕심의 근원을 내 몸에서, 내 무의식에서 찾아내야
한다. 찾아낸 다음에 그 근원을 잠재우는 일은 수행에 대한 헌신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이는 여전히 나에게도 지난한 과제이긴
하나, 언젠가는 필히 그 모든 헛된 욕심으로부터 나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할 따름이다. 다른 길이 없다. 그
도정에서 추락하지 않도록 항상 신께 부탁할 도리밖에 없다, 나로서는.
나는
소명을 받았고, 또한 욕심을 버리겠다는 마음 한 조각이라도 내었으니,
대단히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축복을 받고서도 발견하고,
사랑하고, 축하하지 못한다면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것 아니겠는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가 없다 하고, 행복하지 않다고들 하지만,
나와 같은 '메시지'를 품고 수행의 길을 걷고 계신 나의 붕(朋)님들은
한 분, 한 분이 모두 행복해보이신다. 붕님들 한 분, 한 분의 얼굴을
떠올리면 화안한 햇살을 바라보는 기분이 든다. 행복이란 그것을
손에 쥐기 위하여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존재방식의
부산물이나 귀결의 범주라고 이해하는 나로서는 소명을 받드는 삶이
자연스럽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게 됐다. 그렇다면 그놈의 소명을
어찌 받을 것인가? 그 궁리를 십 년 가까이 해오고 있는데, '끈질기게,
용기를 가지고 두드려라' 밖에는 아직 삼빡한 답을 못 만들고 있다.
이 답 만들어 내면 대박난다.
4. 의무 너머의 행복
지금의
나는 행복을 의무로 규정했던 과거의 나로부터 상당히 벗어난 것이 사실이다.
의무감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다. 자신이 '메신저'이니 자신만은 행복해야
한다는 논리는 매우 오만하다. 이건 감히 신을 협박하는 것과도 같다.
또한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세상의 '당위'들에 대해서 회의적이
돼간다. '이런 저런 것들을 해야 된다'는 도덕적 당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전(全)존재적 동의가 필요하다. 그 원칙을 진실로 받들기 위해서는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그 원칙에 동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나의
몸과 영혼이 동의하는지 어떤지 모르는 원칙을 나의 마음만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해서 내가 받들고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내 마음 속에서도 특히 이성이라는 부분에서
지지해줬었다. 그러나 나의 몸은 행복보다는 자유로운 욕구의 실험과 분출을
원했고, 나의 영혼은 뒷짐 지고 지켜보며 내 존재의 전체적 균형이나
꾀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의무적 행복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제는
행복이란 그저 신의 뜻에 달렸다고 결론짓게 됐다. 나의 몸과 마음과,
그리고 영혼은 '행복해야 한다'는 당위보다는 '자유롭게 나만의
꽃을 피우자'는 결정을 부담없이 수용했다고 믿는다. 그 귀결이 행복이라면,
그건 신께 감사드릴 일이다. 만약에 그 귀결이 불행이라면, 그건 한
차원 더 높은 수행의 경지에 내가 들어가려 하고 있다는 징조일런지도
모르겠다. 주시는 대로 감사히 받을 따름이다. 그 모두가 '선물'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