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행복

수행과 행복 (2010/7/18)

1. 집중 수행

이른 아침부터 땀이 줄줄 흐르는 계절학기. 두 과목에 백 명에 육박하는 학생들을 맡아, 매일 휙휙 나가는 진도에 정신이 없건만, 요즘 2-3주 동안은 수행에 집중했다. 수행 집중 시기에는 잠 자는 시간 빼놓고는 일상의 매 순간을 명상으로 만들고자 한다―그게 다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다 보면 잠 자는 동안의 꿈도 명상의 연장이 되는 것 같다. 꿈속에서 나의 의지를 행사하는 것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대개 평소보다 열나게 수행하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서 못마땅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못마땅한 점에 대해서 뭔가라도 해보려고 열나게 수행한다는 것은 수행이 심리적 작용에 불과하다는 해석을 타당하게 해준다―심리적 보정작용, 또는 보상작용 때문에 수행을 하고 있을 따름이라 볼 수 있으므로. 그러나 이렇건 저렇건 신경 안쓴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용맹정진'하고 있다는 자체가 중요하니까.

이번의 '집중 수행'의 원인은 사실 그 직전의 과도한 수행에 있었다. 정말 바보같이 들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으나 '과도한 수행'의 원인 역시 나 자신의 못마땅한 점을 수정해보려는 데 있었다. 바보같이 돌고 도는 최근 수행의 싸이클을 정리해보자면 이러하다:

① 2, 3주 전 나의 못마땅한 점 포착: 내 안의 탐욕.
② 따라서 과도한 수행 착수: 탐욕의 주체인 '내면 아이' 훈육하기.
③ 내면 아이의 반발과 분노: 사소한 일에 내면 아이의 감정이 전이되어 인간관계에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함.
④ 바보같은 실수를 한 나의 한심함을 자책하여 '집중 수행' 모드에 돌입함.

'과도한 수행'이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집중 수행'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게 들리기도 한다. 그냥 내버려두고 지들이 알아서 해결되도록 기다려줄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엔 내가 너무 마음이 조급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②의 과도성을 충분히 인식했기 때문에 ④의 수행은 과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중한 태세를 갖췄다. 아무런 '훈육'도, 당위도 없이, 아무런 자기비판적 성찰도 가하지 않은 채,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주시하기만 했다. 말하자면 '열공'은 했으되, 그것이 자발적이었고 아무런 외적 강압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2. 수행 리포트: 주의 사항

이번 집중 수행을 통해 느낀 바를 요약하자면, '수행은 고통이나, 고통 없이 행복은 없다'라는 역설이다. 사람은 삶에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나, 쾌락이 꼭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고, 고통이 꼭 불행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쾌락이나 고통과 무관하게 인간은 오직 온전하게 삶으로써만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수행도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행복론'을 펼치기에 앞서서 노파심에 주의 사항을 적자면, 나의 이러한 관찰은 지천명을 바라보는 중년의 그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젊은 내 제자들에게 적합할 것인지 확언하지 못하겠다(제자님들 중, 삼십을 훌쩍 넘긴 아저씨, 아줌마들은 예외). 이런 말을 여기에 적는 이유는, 이제 실제로 이 싸이트를 방문하는 나의 젊은 제자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일례로, 나는 이번 집중 수행 중에 융의 분석심리학 관련 서적을 다시 끄집어내어 열심히 읽었다. 헌데 자아 의식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왜곡하며 갖고 놀기도 하는 아니마나 아니무스 등의 개념은 지성의 높낮이를 떠나 젊은 영혼에게는 꼭 적합하진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이유는, 많은 수행의 '개념' 들이 그러하듯이, 융의 무의식의 개념들 역시 실존의 체험 없이는 전혀 이해될 수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제자님들에게는 나의 글중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그냥 덮어둘 것을 권하고 싶다.

수행 중에 든 또 다른 생각은, 제자님들이 나에 대해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헛된 스승상을 깨줘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군자'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여기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이다. 이런 내게서 '메시지'만 받아서 가면 됐지, 내 인격으로부터 더 받을 게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 낭비다. 나는 그저 게으르고 어리석은 푼수일 따름이다. 나는 정의감에 불타서 사회 운동을 할 줄도 모르고, '조선'도 싫고 '한겨레'도 탐탁지 않으며, 키워주신 아버지에게도 살갑지 못하고, 학술적 논문은 되게 쓰기 싫어하는 것이 저 자신이면서도 든 것 없이 아는 척 하는 학자를 보면 밟아주고 싶어하고, 재정계획 따위는 거의 없어서 돈은 생기는 대로 다 써버리고, 평소에 입에 맥주를 달고 살지만 배나오는 건 싫어서 산에 들낙거리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이다. 최근에 처음으로 뵌 길벗님과의 대화 중에, 나는 화날 때 화내고, 즐거울 때 즐거워 하고, 슬플 때 슬퍼할 뿐이라고 말했더니 '해탈하셨군요'라는 응답을 들었건만, 그건 전혀 아니고, 난 그저 감정적으로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수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물론 나도 세상의 고통받고 헤매는 이들에게 귀감이 돼주고 싶은 욕심 같은 건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욕심은 진정한 보살심에 한참 못 미친다.

3. 수행 리포트: 행복론

행복하기 위하여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수행은, 삶에서 달리 할 게 없어서 하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영혼의 요청이기 때문이다. 수행은 내면의 그림자와 악과 직면할 것뿐 아니라, 자신의 일상적인 경계를 무너뜨릴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종종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는 운동선수의 트레이닝이 고통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행복을 맛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무엇일지 누가 묻는다면, 나는 수행을 꼽겠다. 이는, 행복은 삶의 방식의 귀결이자 노력의 부산물이어서 직접 겨냥하여 획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나의 평소 지론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삶의 방식이나 노력을 어떻게 구성할 때 행복이라는 부산물을 받게 될―수동성에 주의!― 확률이 가장 높을지 따져봐야 하겠는데,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나는 수행이 그 확률을 가장 높여준다고 본다는 말이다.

우선 수행은 삶의 필연인 고통에 우리를 대비시켜 준다. 수행을 하다보면 자신의 삶속의 여정에 대한 일종의 관조가 빈번히 일어난다. 이는 삶에서 조우하게 되는 고통과 번뇌에 대한 내적 면역체계를 강화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고통과 번뇌는 늘 왔다 갔다 하는 것들일 뿐, 그 폭풍우가 지나고 나면 또 고요한 아침 햇살을 볼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관조를 통하여 잘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고통과 번뇌가 엄습할 때,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쉽사리 망각해버리곤 한다.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평소에 수행이 필요하다.

'행복 구현'이라는 관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수행은 삶에서 맺게 되는 수많은 관계에 대한 나의 태도를 고양시켜주고, 그럼으로써 '행복 확률'도 높여준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여서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선 심신이 평화롭기가 어렵다. 워낙에 인격적 흠결 투성이인 나라는 인간이 중년 이후에 기본적으로 평화로운 심신을 유지할 수 있고, 따라서 행복감을 맛보는 확률이 높아진 것은, 그나마 수행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게 된 것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뻔뻔하고도 오만한 말이 되겠으나, 나는 내가 가족과 주변 친지들과 벗(友)들과 길벗님(朋)들과 제자님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그렇지 않은 이들을 빼고는. 수행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수행 없이는 내 안의 그림자와 악이 더더욱 커졌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나는 결코 가까운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신뢰하는가? 나는 내 안의 악을 인정한다. 그 악이 이기적인 욕망을 생성시키는 점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인에게 해를 끼칠 행위를 내가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오만한 글을 써놓고 이를 어길까 두려워 항상 기도할 것이라는 점도 믿는다. 나의 내면의 모든 악과 음습함과 그림자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요만큼만이라도 나를 믿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나는 무한한 감사의 염을 느낀다. 감사할 때 행복을 맛볼 수 있다.

또한 수행은 내가 삶속의 사소하고 작은 일들의 가치를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이는 최근 미국의 심리학계에서 대두되고 있는 '행복 심리학'의 주장과 통하는 바가 많다. 셀리그만이나 칙센트미하이와 같은 원로 거장들이 이끄는 이 캠프는 삶의 다양한 편린들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미세한 부분들에 대한 긍정적 의식을 통해 행복감이 올라간다는 주장을 제기해왔다. 수행이 바로 그런 것 아닌가. 평소의 걸음 걸이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내 곁에 있는 이와 무심코 나누는 일상의 대화 밑에 깔린 심연의 욕구에 불을 비춰보고, 꿈속에서 만난 이가 던진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에 대해 상상해보고 하는 모든 것들이 수행 아닌가. 어떤 냉소주의자들은 수행의 도구로써 많이 쓰이는 명상이 현실의 주된 과제와 도전―돈벌이, 승진 등―에 대해 눈을 감게 하고, 무가치한 사소한 일들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일종의 마취제 기능을 한다고 비판하는데, 나는 이것이 일고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는 본다. 그러나 그 '무가치한 사소한 일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때 우리 존재의 심연이 긍정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우리의 현실적이고 '주된' 과제에 대한 대응력도 점차적으로 향상된다는 '합리적' 해석을 애써 무시할 필요는 없겠다.

그리고 사소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꼭 심오한 성찰의 형태가 돼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가족 간의 일상적인 농담, 짤막한 글 한 줄, 시원한 맥주 한 모금만으로도 사람은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내 경우에는 "한 모금"만으로는 좀 미흡하다 느끼긴 하지만... '돈벌이와 승진' 등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사는 나에게, 벗들은 "너가 제일루 잘 산다"라거나 "너가 제일 행복해보인다"라고도 말해준다. 지금, 여기의 '과정' 속에서 행복하라는 나의 지론과, 행복은 목표의 달성에 있지 않고 추구의 과정 속에 있다는 행복 심리학 쪽의 주장도 서로 통한다고 본다. 행복은 미래에 황금과 명예를 획득함으로써 누릴 수도 있겠으나, 바로 지금 여기의 소박한 일상을 가슴속에 받아들임으로써도 손쉽게 누릴 수 있다. 내가 비록 전자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전자를 추구하는 이들중의 다수가 사소한 데서 맛보는 소박한 행복감을 지나치게 희생하면서 돈과 지위를 추구한 나머지, 아예 후자의 능력 자체를 상실해버려서, 정작 '황금과 명예'를 쟁취한 다음에는 행복하게 사는 법을 몰라 우울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본다.

여기까지 거론한 사항들은 젊은 제자님들의 '행복 추구'에도 적합성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삼십대 중반 이후의 여성과 남성은 한 가지 더 챙겨둬야 할 게 있다. 예컨대 융은 '아니마', '아니무스'로 표현했는데, 전자는 남성 안의 여성성이고 후자는 여성 안의 남성성이다.ª 이를테면 나는 내 안의 아니마의 존재(또는 기능)를 확인했다고 믿고 있으며, 그 아니마가 전해주는 내 내면 가장 깊은 곳, 즉 신과 맞닿은 그곳에서 우러나오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 이것이 나의 수행의 가장 깊은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 나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며, 아니마의 메시지를 제대로 받아들일 때 나의 인간으로서의 역량이 가장 커진다고 믿는다. 내면의 신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 때, 나는 가장 창조적 상태에 들어가 있다고 믿는다. 물론 자주 듣지는 못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잘 들을 수 있을지 확신할 만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수행을 불가에서는 만행(萬行)이라 했다―일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수행이란 의미에서. 아니마 이론 같은 것은 개념적인 하나의 예일 따름이다. 내 논지는, 행복을 위하여 사람은 중년에 이르러서 내면의 깊은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심각한 수행을 시작해야 하리라는 것이다―그 형태가 종교생활이 됐든, 철학책 읽기가 됐든, 심리 분석이 됐든, 글쓰기가 됐든, 그 무엇이 됐든 간에. 물론 그 필요성을 자각하는 이의 수는 매우 적지만.

ª다음의 양서에 이런 이론이 잘 설명돼있다: 이부영 저, 『아니마와 아니무스: 남성 속의 여성, 여성 속의 남성』 (분석심리학의 탐구 02) 한길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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