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성숙

인격적 성숙 (2010/1/10)

어떤 이가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다. '됨됨이'는 윤리적인 차원 보다는 인격적 성숙이라는 차원에서 쓴 표현이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 식의 윤리학적 성숙은 물론 가치있는 지향점이지만, 그런 차원을 거론하기 전에 한 개인의 내적, 심리적 성장과 성숙의 차원을 짚어보는 일도 인간 이해의 중요한 단계일 것이다. 즉, 어떤 이가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타인에게 함부로 군다면 그건 윤리의 문제이기 이전에 그의 인격이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나 자신 포함하여,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미성숙하다. 심리적으로 성숙한 이는 자신 내면의 어둠을, 콤플렉스를, 상처를, 앙심을 타인들에게 투사하지 않기에 윤리적 차원과 상관없이 타인들을 존중하고 존귀하게 대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처럼 심리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감정 투사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나는 특히 지난 한 해 동안 여러 대학에 시간 강사로 나가며, 이같은 심리적 미성숙을 나 자신과 그밖의 여러 사람들에게서 목격할 수 있었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을 심판하는 것은 인간 능력 바깥의 일이다. 내가 보고 겪은 구체적인 타인을 성숙하거나 미성숙하다고 심판해버릴 자격 따위는 누구에게도 없다. 한 타인의 인격적 단면, 또는 부분을 소재삼아 인간 전반에 대한 이해에 다소나마 보탬을 얻을 수 있으면 될 일이다. 나는 미성숙한 이들을 접하는 경험을 신께서 주신 선물로 믿는다. 미성숙한 그들에게서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미성숙한 나를 성장시켜주기 위해 고안하신 커리큘럼의 일부라고 믿는다.

나를 대학으로 불러주신 교수님들은 나를 존귀하게 대해주는, 인격적으로 성숙한 분들이다. 그러나 모든 시간 강사들이 그런 존귀한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이 학교, 저 학교의 강사 대기실에서 스쳐가듯 만나게 되는 강사들과 담소하다 보면 그 '보따리 장사' 생활의 애환이 절절히 느껴진다. 지방 캠퍼스의 수업 한 시간 맡아서 KTX 타고 1주일에 두 차례 왕복하고 나면 수중에는 음료수 캔 하나 사먹을 잔돈밖에 남지 않는다는 이. 직장 생활하는 벗들이 월급 6백만원으로 살아가기가 빠듯하다고 투덜대기에 자신은 연봉이 6백만원이라고 말해줬다는 이. 교수들이 수업시간 배정하면서 강사들 개인 사정은 고려해줄 의사 자체가 없고, 잡역부 뽑아다 쓰듯이 함부로 대하기 일쑤라는 이, 등등.

나도 약간은 공감하는 바이지만, 학계에 몸담고 있는 많은 이들이 동료 대학 교수들의 인간 됨됨이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내린다. 밖에서 보는 이들은 고상한 학자들이 인격적으로도 고매할 것으로 짐작할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같은 사회적 존경의 대상이 되는 직종의 종사자들인 대학 교수나 성직자 등 중에서 인격적으로 미성숙하여 흔히들 "싸가지 없다"는 평을 듣는 이들을 꽤 많이 기억해낼 수 있다. 어쩌면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런 평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하여튼 간에,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대학 교수들이 적지 않다는 말은 현대 학문이 인격의 성숙과는 별 관련이 없는 분야임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겠다. 현대 학문 대부분의 영역이 지적 성능만을 중시하지 심리적 성숙이나 정신적 덕성은 별개의, 또는 논외의 사항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새삼 상기해볼 때, 현대 학문의 중심을 점유하고 있는 대학 교수들 중에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이들이 적지 않다는 관찰이 놀랄 만 한 일은 아니다.

힘없고 불우한 '비정규직' 시간 강사들 중에서 불운하게도 그런 미성숙한 교수와 만나게 된 이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푼돈도 못 챙길 지방 강의를 맡거나, 일용직 잡역부 취급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물론 시간 강사들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는 일부 인격적 장애가 있는 교수들에게서 기인한 문제가 아니라, 대학과 교수 집단 전체라는 기득권 층의 탐욕을 재생산하는 우리 사회의 권력구조에서 초래된 문제다. 그런데 이같은 구조적 문제와 인격의 성숙은 과연 별개의 문제일까? 혹시 우리 사회의 부도덕한 권력구조가 대학과 교수 집단의 이기주의를 배태하거나 강화시킨 것은 아닐까? 아니면 역으로, 대학과 교수 집단의 이기심이 권력의 부도덕성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나는 상호작용일 것으로 생각한다.

권력과 계층과 탐욕의 틈바구니에 끼인 '루저'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 강사가 있겠는가만은, 나의 '신앙'은 나로 하여금 구조적 모순에 대해 저항할 의지를 북돋워주지 않고 '영적인 대응'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아편'으로써의 종교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할 만 하다. 영적인 대응이란 일면 유심론적 환원주의의 오류의 극대화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기꺼이 그 쪽을 택한다. 왜냐하면 오직 영적인 대응을 통해서만 내가 우아하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아함은 겉모습이 아니다. 우아함은 존재의 방식이고 영성과 조응하는 방식이다. 내가 우아하게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 앞의 현실을 신께서 주신 은총과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수행한다. 수행이 나를 억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고요를 찾는다. 오직 고요 속에서 평화로울 수 있을 때에 나는 수많은 젊은 영혼에게 다가가도록 사회적으로 허락된 나의 강사 직분을 성직으로 감사히 받아들인다. 그래서 신세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그래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들먹이며 욕하지 않는다. 동시에, 나의 영적인 평화만이 그 구조적 모순의 변화를 촉발시킬 수 있을 유일한 현실적 대응 방식이라고 믿는다.

심지어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학자들 중에도 인격적 성숙과 거리가 먼 이들이 적지 않다면, 이는 우리 사회가 중병을 앓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미 늙어버린 나같은 미성숙한 성인들(자기 모순)에게 큰 희망을 걸 수는 없고, 앞으로 성숙의 과정을 겪을 젊은 세대를 바라볼 도리밖에 없지 않겠는가 싶다. 그들이 탐욕과 자기보호 본능을 뛰어넘어 약자를 배려하고 다 함께 가는 공동체를 구축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탐욕과 이기심으로부터 해방돼야 하고, 그런 선생으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함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나의 수행은 나 자신과 세상을 위한 소명이다.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나같은 이가 그런 소명을 받았고, 그 소명을 통해 실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이 미성숙한 중년 남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불가해하기는 하지만.

'수행일상 2010'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