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혹한 속에서 (2010/1/19)
©
Suk Hoon Han
계절학기가
끝나고 나서는 이삼일에 한 번씩이라도 눈 쌓인 산길이나 하천 변길을 찾는다. 느긋하게
등산을 즐길 시간적 여유는 내지 못하여 가까운 곳을 빠른 걸음으로
다녀온다. 방학이 돼서 낮에 거닐 수 있다보니 지난 여름방학
때가 떠오른다. 그 당시 빵구난 재정을 메우기 위해 한 달 동안 영어학원을
뛰어 겨우 돈을 마련하면서 새삼스레 절감했던 냉엄한 사실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라고나 할까. 자그마한
현실적 성과라도 내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게 땀 흘리는 노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당연한 진리를 나는 망각한 채 살아온 것은 아니었던지.
지난
연말에는 적지 않은 보수의 일감을 맡을 수 있었는데 의뢰인 측의 무례함에
고개 숙이기 싫어 그 일을 거부했다. 그때 좀 굽히고 일을 받아서 했더라면
올 겨울이 조금이라도 덜 추웠을 텐데, 그깟 자존심 때문에 몇 백 만원을
차버리다니, 나라는 인간이 아직도 배가 덜 고픈 게다. 하지만 뭘 그리 헐벗고 산다고
자존심도 버리고 굽실거리며 돈벌이를 해야 하는가? 오만한 프라이드가
아니라 자신을 중히 여기는 dignity(존엄성)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나는 아직 표면적
인격인 페르조나가 미성숙한 단계이기 때문에 아마도 자존심을 잘 지켜주는 편이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올해 들어 또 다른 일거리가 비슷한 양상으로
'무례하게' 제시되는 흥미로운 반복 현상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신경은
거슬렸으나, '그깟 자존심이 밥 멕여주냐'는 매우 실용적인 반응이 마음에서
일어났고, 그래서 그냥 나 자신에게 피식 웃으며 일감을 덥석 주워 먹었다.
작년
한 해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빚 한 푼 지지 않고 처자식 먹여살렸다.
돈도 못 버는 비정규직 '루저'라는 자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빚 안 지고, 남에게 손 안벌리고, 열심히 땀 흘려 번
정직한 돈으로 한 해를 잘 생활할 수 있었다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올 한 해도 그렇게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시옵기를 신께 간청하고 싶어진다.
허나
이렇게 자부심을 느끼는 것과는 별도로, 여전히 절대적으로 나의 재정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고, 그래서 계절학기 수업도 뛰었지만 4인 가족
부양을 위한 적정 액수가 모이지 않는다. 하루는 저녁 식사 때, 둘째
딸이 다소 수강료가 비싼 취미 학원에 보내달라는 것에 아이 엄마가
제동을 걸자, 아이는 왜 제 친구들은 다 하는데 자기는 못 하느냐며
볼멘 소리를 했다.
눈물이 맺힌 어린 딸의 풀죽은 모습을
아무 말도 못한 채 바라보며 삼키던 밥덩이가 식도 속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그날 저녁을 떠올리니, 이 추운 겨울을 어찌 날 것인가 근심의 분수가 마구 샘솟는다.
주먹을 꽉 쥐고, '그러나 난 결코 지지 않아'라고 되뇌이며 영하 10도의 혹한을
일부러 뚫고 힘차게 걸어간다. 이런 날씨에도 건강을 챙겨 일부러 운동하는
것은 내 몸뚱아리라도 성해야 제대로 일하고 벌어서 새끼들 먹이고 내
일을 계속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악문다.
그러나 천변 길 눈부신
하늘과 반사된 산허리의 눈밭을 바라보며 걷다가 차디찬 북풍에 이마가
시려올 때, 모든 근심과 갈등과 좌절 속에서 고요해짐을 배운다. 고요를
잊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신성모독이다.
작년 여름에 빵구났던
재정 메우고, 가을 내내 일해서 먹이고 입히고
놀고, 그래서 여전히 따스한 집에서 맛있는 밥 먹으며 오손도손 살고
있음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거늘. 지금 요만큼 힘들고, 쪼들리며 살고
있다고 해서 '역시 돈이 최고야'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면, 그게
바로 십년불공 도로아미타불이렸다. 신용카드로 땡겨서 아이티 참사 지원금을 쥐꼬리만큼
냈다. 그런 일에 10만원도 못 쓰는 나 스스로가 무능하다 생각은 되지만,
재정적으로 다소 무능하다 하여 나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으련다. 그만큼이라도
쪼개서 낼 수 있었음을 감사하겠다.
타임 지에 작고한 미국 소설가
레이몬드 카버(Raymond Carver)에 대한 글이 실렸는데, 그의 삶과 그의
글에 대한 묘사가 가슴에 와닿았다:
젊은
작가들을 위한 표준이 되는 조언은 언제나 "네가 아는 것을 적어라"였다.
레이몬드 카버는 바로 그것을 했다. 그의 생애 대부분의 기간동안 카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육체적인 차원과 심리적인 차원
양쪽의 고난이었던 셈이다 .... [그의
단편 소설에서]
삶이란 일종의 끊임없는 고난의 제공장소와 같았다. 낡아빠진 아파트,
밀린 집세, 집 밖의 길가에다 내동댕이쳐놓은 거실의 가구들. 사람들
또한 제 자리에서 쫓겨나 있는 듯, 어느 한 곳에 자리라도 잡게 되면 제 상처나 핥고
있거나 술이나 퍼마실 뿐이다.
카버라는
작가는 불행과 고난을 직접 살아봄으로써 그것의 의미를 글로 풀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지천명의 나이가 가까워 새삼 작가로서 살아보겠다고
작정한 나에게도 다소간의 어려움은 불가피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 같다.
별 고생 안 하고 편하게 대우만 받으며 살아온 지난 날의 내가 어찌
삶의 어려움과 애환에 관해 글을 쓸 수 있겠으며, 인생고(苦)에 대한
어떤 방식의 대응이라도 담겨있지 않은 글이라는 것을 쓸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십수 년 전에 미국에서 비디오 테입에 녹화해둔 '오딧세이'라는
영화를 딸들과 함께 봤다. 둘째 나나는 특히 그리스 신화를 좋아하는
터라 신이 나서 봤다. 트로이 전쟁의 승리 이후에 오딧세우스가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을 바라보며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영웅 오딧세우스도 신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먼지에 불과한
존재이며, 바로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그의 여정의 목적이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신은 우주의 주인이고, 주관자이며,
세상의 참된 본성이자, 나의 참된 자기이다. 그 '신' 없이는 나는 우주의
먼지 알갱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오직 신(적인 본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자신의 얄팍한 에고를 만족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진실을 깨닫지 못했던 탓에 오딧세우스는 신의
예언 그대로 오랜 기간 동안 떠돌아 다녀야 했고, 고통을 겪으며 역경을
극복해야 했다. 그같은 운명은 인간이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로서 있는 것만이 중요하므로 주어진
운명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있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나로서
있는 것이 바로 내가 선험적으로 신과 맺은 계약이기 때문일 것이다(뚜렷한
증거는 갖고 있지 않지만). 따라서 나는 내게 주어진 잔을 기쁘고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항상. 이타카라는 고향마저도 실은
오딧세우스가 신의 계획을 충실하게 따른 것의 귀결이었을 따름이다.
이타카에 다다르는 것보다도 오딧세우스의 고통의 여정이 더 중요하다.
'오딧세이' 그 자체가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늘 더 나아지기를 갈망해왔음을
기억한다. 그 갈망은 표면적 에고의 수준에서 뿐만이 아니라, 나의 본질적
'자기' 수준에서도 그러했다. 나는 본질적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갈망해왔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비록 그같은 자신의 본 모습을
전혀 깨우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을 뿐.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는 나의 마음을 누가 여기까지 이끌어 왔을까?
한
외국 영화에서, 내 나이 쯤 돼보이는 사업가 사내가 불경기로 사업을
접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자신의 노모를 찾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장면이 나왔다. 어머니에게 털어놓는 그의 고백을 듣고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울며 말했다, "어머니, 전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 모두가 실은 그러하지 않은가? 정말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가? 남한테 칭찬받고 잘나 보이는 의미에서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갈망에 들어맞는 바로 그러한
자신이 되고 싶지 않은가? 진정한 자기(self)가 되기 위한 여정이 오딧세이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운명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운명을 사는 것, 그 운명 안에 나로서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 운명이 나를 기쁨으로 인도하건, 슬픔으로 몰아가건,
그러한 흐름의 구비 구비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신께서 내게 주신
잔을 고마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