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내 방식대로 (2010/2/17)
©
Suk Hoon Han
1.
꿈속에서
나는 연구실 씽크대의 음식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난감해 하고
있다. 처리 방법을 찾아 길을 나선 내가 당도한 곳은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한 남자고등학교였다. 그 학교 곳곳을 다녀도 나의 쓰레기를
처리할 방도를 찾지 못하다가 학교 정문에 붙어있는 작은 매점에서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발견했다. 내가 그 봉투를 사가려 하니 매점의
사무적인 여자 상인은 봉투를 팔 수가 없고, 내 쓰레기를 자신에게 가져와야만
자신이 봉투에 넣어서 버려준다는 것이다. 내 집안 쓰레기를 이 학교까지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이 불합리하다 생각하여 나는 그 매점에 등을
돌리고 내가 직접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다른 봉투를 구하기로 했다.
그때 연구실 부근에 돌아와 내가 발견한 것은 동네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담아주는 꺼먼 비닐 봉투였다.
스스로 해몽해보자면, 실제로 나는 별 살림살이가
갖춰져 있지 않은 연구실에서 어쩌다 끼니를 해먹게 될 때 그 잔여물의
처리를 아주 싫어하고 귀찮아 한다는 일상의 감정이 꿈에 반영돼있다.
집에서야 늘 밥해먹고 사니까 음식 쓰레기 모아뒀다 처리하는 장치가
구비돼있지만, 오피스텔에선 따로 모아서 엘리베이터 타고 1층으로 내려가
주차장 저 끝에 있는 쓰레기 처리장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기도
하다. 음식 쓰레기란 내 마음속의 쓰레기를 뜻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처리하고 싶다. 내 마음을 정화하고 싶다. 그러나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기성 종교집단에서 그 정화의 기제를 잘 찾지 못한다. 겨우 그 종교집단에
부속된 상업적 서비스 기관에서 판매하고 있는 정화 기제를 발견하나,
그것 역시 나를 소외시키고 그 기관이 정화해줘야 한다는
점이 불만스럽다. 나는 내 손으로 정화를 하고만 싶은 것이다. 그래서
찾게 된 정화의 기제가 서민적이고, 일상적이며, 볼품없는 검정 비닐
봉투였다. 아마도, 기성 종교를 멀리 한 채 내 일상 속에서 나
스스로 내 마음을 정화시키고 참된 나를 일으키는 수행을 지속하겠다는
나의 의사가 꿈에 이렇게 나타난 게 아닌가 추측한다.
2.
평소
나는, 우리나라의 많은 성인들이 쉽게 기독교 교회의 메시지에
이끌리게 되는 이유가, 그들이 한국사회 속의 삶에서 참된 자기(自己;
Self)를 경험해보는 일이 철저하게 결핍돼있다는 사회심리적 요인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국가간 비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가 대단히
경쟁주의적이고 이전투구가 극심한 곳이라고 친다면). 분석심리학적으로
보자면 그 결핍은 어떤 방식으로든 채워져야 하는 것이고, 사람들의
무의식은 그 결핍을 쉽게 채워주는, 즉 감쳐줬던 자신의 참 자기를 쉽게 밝혀주는
기독교적 메시지에 자동적으로 강렬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종교가 참된 자기를 밝혀주면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무익할 뿐 아니라 해가 되기도 쉽다. 내가 기성 종교들에 가담하지
않는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본질적으로 참된 자기를 불러일으키는 메시지를
함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적 성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뿐더러, 종종 역으로 참된 자기를 가려버리는 행태를 조직적, 집단적 차원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도 차차 기성 종교의 조직적, 집단적
습성을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참된 자기를 찾고 나아가 신성에
다다르는 영성 프로그램 같은 것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런 수요는 '성인을 위한 자기실현 계발 프로그램'과 같은 매우
세속적인 용어와 개념을 차용한 방식에 의해서 충족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서구에는 이미 이런 프로그램들이 꽤 많이 나와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들 중에는 안쪽 깊숙한 곳에다가 신성, 영성
등에 대한 본질적 추구를 묘하게 포장해둔 모습도 심심찮게 보인다.
3.
무술의
고수가 되기로 굳게 결심한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가 어떤
무술의 위대한 비전(秘傳)을 안다고 하여 고수가 되지 않는다.
무술 비전을 읽었다고 하여 고수가 되지 않는다. 무술 비전을 완전히 암기했다 해도 고수가 되지 않는다.
무술 비전을 지식으로 통달한 무리의 일원이 됐다고 고수가 되지
않는다. 무술 비전을 몸을 써서 수련하여 육체적으로 통달했다고 꼭 고수가
되지 않는다. 오직 그 비전을 지식으로, 육체적으로 통달한 뒤에, 실전에서 그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적을 제압하는 경험을 숱하게 겪어낸 뒤에라야
진짜 고수가 되는 것이다. 또한 진짜 고수도 언제든지 패할 수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에라야
진짜 고수인 것이다. 따라서 부단히 자신을 연마하여 항상 완벽을 추구할 때 그는 진정한
고수로 세상의 우러름을 받게 된다.
나는 세상의 수많은 경전들에 대해서 조금 안다.
나는 그 경전들 중에 몇 가지를 읽어봤다. 내가 읽은 것들 중에 암기하는 구절이 조금
있다. 각 경전을 숭앙하는 어떤 교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경전의 가르침을 따라 나의 심신을 다소 수양해봤다.
실생활에서 경전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해봤으나, 그 결과는 백전백패였다.
형편없이 불충분한 경전 공부와 수련의 당연한 귀결이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 여러 경전들의 가르침을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다시금 인간세에서 '실전'을 경험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제발 이번에는 패하지 않기만을 간구하며. 산속에서 홀로 수련하여 완벽의 경지에 이르는 무인과도 같이, 경전
공부를 완벽하게 하고 난 뒤에 세상과의 실전에 임하면 승리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나는 산속의 나홀로 수련이 환상이라고 생각하여
무작정 세상속의 실전에 임해야 한다고 믿는다. 매번 패하기만 하는 것이 한심하기도 하지만, 세상과의 실전을 피한다면
경전 공부를 애초에 시작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절대로 저버릴 수 없는 초심을 품고 살기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경전을 공부하고, 세상과 대결한다. 이러는 나를 고수인 줄로 착각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완전한 착각이다. 나는 늘 패배하는 하수에 불과하다.
4.
참된
자기를 찾아가는 길과 우리 사회의 종교들 간의 상호작용(긍정적, 부정적)을
아동의 수준에서 모색해보기 위한 일종의 아동 종교·철학서를
구상해오고 있다. 상당 부분 원고도 집필돼있지만, 새삼 아동심리학적
고려를 보강할 필요를 느껴 겨울방학 동안 그 공부를 좀 했다. 그런데
심리학과 철학, 또는 종교학보다도 결국에는 그 내용을 이끌어갈 나의
영성의 피폐함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부각됐다. 그래서 최근에는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영성을 밝히는 책과 경전 등을 읽으며 홀로 묵상하는
기회를 많이 만들고자 했다. 그리하여 신께서 내게 보내주신 메시지는,
'두려워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믿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나를 광신도라 부르는가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