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

나르시시즘 (2010/4/25)

나는 대학에서 훈장질 하면서, 나이 어린 학생들보다는 성숙한 학생들과 대화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말도 통하고 배울 것도 많은 것 같아서다. 1학년 신입생들 대상의 교양 과목이 제일 힘들었다. 복학생과 졸업반 학생들이 대하기 더 편하고, 취직한 제자나 늙은 대학원생들은 더더욱 편하다. 한 번은, 거의 내 세대인 듯한 대학원생 한 사람이 교사의 동기유발 기제에 관한 의견을 피력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린 모두 나르시시스트 아닌가요?"

진행중이던 다른 논제 때문에 이 선언적인 질문에 대응할 기회를 놓쳤으나, 그것은 내 뇌리에 각인됐다. 나중에 혼자 생각해보니, 1차적인 내 이성의 반응은 "No"였다. 그건, 내가 선생질이라는 것을 타인 지향적 봉사라는 당위적 측면에서 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에 빠져있는 나르시시스트는 선생으로서 자격미달이다'라는 당위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중한 당위는 현실 앞에 맥을 못추고 스러져 버렸으니, 그건, 선생질 하는 내 마음 속에 나르시시즘이 명백히 자리잡고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존경받는 선생이고 싶다. 이건 인기있는 선생이거나 사랑받는 선생이 되고 싶은 욕구 보다는 다소 양호한 나르시시즘이 아닐까 싶다. 후자의 욕구들도 완전히 초월한 건 결코 아니지만, 그러나 인기가 없고 원망을 받아도 좋으니―고지식한 채점이나 따끔한 충고 등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존경받는 선생이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한 것을 볼 때 상당히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즐로우의 욕구계층이론에 따르면 존경 욕구가 상위 욕구이긴 하나 자기실현보다는 수준이 낮은 욕구다. 자기실현 욕구가 나의 지배적 욕구라면 내가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건 말건 문제가 안된다. 아니, 오히려 존경 따위는 내팽개친 채, 학생이 제 한계를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마구 자극하는 '못된' 선생 쪽이 자기실현을 지향하는 참스승 상에 더 가깝다.

내가 그만한 그릇이 못 되는 것에 대해 조상 탓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스스로를 탓해봤자 나올 것도 없고 하니, 그냥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긍정적으로 볼 요소를 뽑아보자.

사실, 나르시시스트인 '나'를 까발리는 것은 대단히 낯간지럽고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과거에 함석헌 선생이 여대생들의 과도한 몸치장을 나무랐다가, 실은 자신의 겉치장도 여대생들의 경우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았다던 일화가 떠오른다. 나도 실은 제멋에 살고 있다. 남들이 나를 그렇게 봐주기를 바라는 바에 맞도록 나를 치장하고―또는 치장하지 않고, 대개는― 산다. 즉, '돈과 명예 따위는 멀리 하며 뭔가 정신적인 면을 추구하는 것처럼 고매해 보이는 학자 풍의 중년 남'이 그것이라 하겠다. 대학교 화장실 거울에 비친 허름한 옷차림에 배낭을 둘러맨 자신의 모습이 바로 자신이 바라는 그런 모습과 일치한다고 믿으며 만족한 미소를 짓는 그 순간, 나의 나르시시즘은 완성되는 것이다. 바로 헐리우드 고전인 '선셋 대로'에서 한물 간 왕년의 스타 노마가 뉴스 카메라 앞에 다시 설 때 보여주던 미소가, 슈렉2의 챠밍 왕자가 대단히 폼을 잡으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때 보여주던 미소가 나르시시즘의 정수가 아니겠는가.

아마도 나르시시즘은 근본적으로는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나'와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인 에고를 보호하고 받들어 올려주기 위한 심리적 장치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자신을 독립적인 개체로서 긍정하고 사랑해줘야 성공적으로 생존하고, 번식하고, 번성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또한, 영성 차원의 자기실현 노정에서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나르시시즘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때때로 있다. 예컨대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선생이고 싶다는 나르시시즘의 욕구로 인해 내가 수업 준비에 정성을 들이는 경우가 그것이다. 젊은 학생들에게 양질의 수업을 제공하도록 도움을 주는 한도 내에서 나르시시즘은 유용한 셈이다. 적어도 그것은 '중년의 위기'를 겪는 사오십대 남성들이 고급 스포츠카를 소유함으로써 스러져가는 자신의 번식 역량을 포장해보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수준의 나르시시즘에 비해서는 덜 경박하고 덜 부끄럽다 하겠다(뭐, 생물학적 본성을 굳이 '부끄럽다' 할 일도 없겠지만).

선생들은 죄다 나르시시스트가 아니겠냐는 그 대학원생의 의견은 정확하다. 선생들의 나르시시즘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잘 활용함으로써 그들의 역량을 제고하는 것은 쓸만 한 작전이겠다. 발도르프 학원의 고문인 원로 교육자들은, 가르친다는 것이 'life-long performing art' [평생 완성을 추구해야 할 퍼포먼스 예술]이라고 결론짓는데, 퍼포먼스 예술가의 힘의 원천에 나르시시즘이 자리잡고 있는 한, 선생들의 나르시시즘은 깊고도 세심한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하겠다. 그래서 나는 나의 그것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다.

그러나 한 차원 더 올라가 영적인 존재로서의 나인 '자기(Self)'를 드러내줘야 할 계제에 이르러서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장애가 돼버리는 것이 나르시시즘이겠다. 자신의 몸뚱아리와 자신의 에고, 자신이 평생 공들여 가꿔온 페르조나(사회적 자아, 가면)만이 너무도 소중할 경우, 그러한 나르시시즘은 영혼의 드러남을 가로막는다. 에고와 페르조나가 영혼인 '자기'에 이르는 경로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것들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자기실현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기'란 '나'와 타인과의 경계 따위는 원래 없다는 진리를 깨달을 때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고는 나와 타인과의 분리라는 환상에서 자라난 강력한 착각이며, 그러한 분리의 착각을 굳건하게 해주는 것이 나르시시즘이기 때문이다. 분리의 환상을 극복하지 못한 영적인 지도자들이 가장 지독한 나르시시스트가 되는 예는 나라 안팎에 숱하게 보인다.

그래서 선생인 나의 나르시시즘을 죽기 전에 초월할 수 있을지 한 번 두고보려 한다. 그것을 제거하거나 내다버릴 생각이 없는 이유는, 그런 일은 실현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이성적 추측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나르시시스트인 나와 자기실현을 발동시키는 나가 불가분하게 얽히고 섥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나이를 먹으며 성숙해진다면, 그때에는 후자인 나가 우세해지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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