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계곡에서 (2010/5/11)
©
Suk Hoon Han
쉬는
날 오후 늦은 시간에 뒷산의 계곡 길을 거닐었다. 두 달 전부터 예쁜
딸 손 잡고 다니며 관찰해온 올챙이들은 개구리 흉내를 내며 웅덩이를
헤엄치고 있다. 계곡 깊숙한 곳으로 파고 들어가 아무도 오지 않는 고요한
바위에 걸터 앉았다. 바위 앞으로는 폭이 좁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고, 그 물 건너 편에는 화려한 복사꽃이 풍성하게 피어있고, 오른
쪽 저 앞에는 벚꽃 잎이 서서히 져가고 있다. 그 꽃잎이 냇물에 떨어지고
또 떨어져 웅덩이 하나를 온통 뒤덮고 있다. 사랑스런 꽃잎이 흐르는
물.
잠시 흐르는 꽃잎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처음 보는 멧새 한
마리가 내 발치에 날아와 앉았다. 가만히 고놈을 보고 있자니, 저도
가만히 있는다. 도망갈 기색이 없다. 저 어리고 어여쁜 멧새 녀석은
왜 내게 왔을까. 도망도 안 가는 고 녀석이 하도 귀여워 휘파람을
불어줬다. 마치 내가 성 프란치스코라도 된 듯이, 자그마한 산새와
휘파람을 불며 놀았다. 이윽고 멧새의 친구 녀석들이 두어 마리 더 날아와
주변을 맴돌며 지저귀기 시작했다.
내가 삶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냥 이렇게 자연 속에 있는 것 아니었던가.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런데 이런 다소 철학적 상념을 떠올리자 머릿 속에 생각의
파편들이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그러자 기이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중의
하나는 참새구이 이미지였다. 신기하게도,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에 멧새들은 휘리릭 날아가버렸다. 타락한 상념의 옅은 흔적만으로도
순수함은 상처받는 것인지.
홀로 남겨진 공간이 허전하여 몸을
일으켜 계곡의 상류로 올라가봤다. 작은 폭포가 흐르는 동그란 물가에는
몇 주 전에 딸내미가 발견하고 환호를 질렀던 산오리 한 쌍이 여전히
살고 있었다. 여전히 사이 좋게. 그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멀리
돌아서 계곡을 올랐다. 사이좋게 붙어있는 산오리 부부는 왜 어여쁘게
보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간사회의 가치관을 들짐승에게 투사하여
보는 것은 온당한 일인가.
인생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늘 일어난다.
계곡을 완상하고 내려가는 길에 산자락 입구에 위치한 산지기 집에 눈길이
갔다. 그 기묘한 집 주변에는 산지기가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시비(詩碑)와 목제 조형물들이 난립해 있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그것들이
거의 다 파괴돼있었다. 저 초로의 사내는 무슨 일로 자신의 인생의 성취를
저렇게 파괴해버렸을까.
인생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늘 일어난다.
그 일들이 일어난 연유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그 연유를 모른다. 다만 삶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일들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할 따름이다. 어떤 일은
과거에 내가 저질렀던 과오를 씻을 기회로 간주하고, 또 어떤 일은 전
번에는 드러내는데 실패했던 내 안의 숭고한 용기를 드러낼 두 번째
기회로 여기기도 한다. 때로는 내게 일어나는 일이 과거에 내가 감수해야
했던 희생이나 피해에 대한 보상을 제공해줄 기회일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이런 의미 부여는 종종 엉터리일 수 있으나, 그렇게 의미를 자의적으로 부여하며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일들이 내게 주어진 진짜 연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시기가 도래할 것으로 믿는다.
겨울이 그다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봄날은 참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