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인사 (2010/1/2)
©
Suk Hoon Han
우리
집은 신정을 쇠기 때문에 새해 첫 날이 언제나 바쁩니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의 세배를 받고, 세뱃돈 주고, 처자식 차에 태워 아버지 댁에
가서 아버지도 차에 모시고 수도권 한 위성도시의 큰 댁에 가서, 그댁
분들께 세배 드리고, 떡국 먹고, 오후에는 아버지 모시고 작은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강남의 친척 댁에 또 가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귀가하면
밤 10시는 됩니다. 그래서 새해 첫 날, 차분히 명상할 짬도 내기 어렵습니다.
둘째 날 쯤 돼서야 아침에 식구들보다 먼저 깨어나 작은 아이 책상 앞에
앉아 창밖을 내다볼 여유가 생깁니다.
눈이 살짝 덮여있는 집앞
길이 평화롭습니다.
매일 아침 그러듯이 아침 기도를 드리려
합니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해서 머리가 부스스해졌기에
기도 직전에 고개를 돌려 옆의 거울을 쳐다봅니다. 십여 년 전에
내게 오신 그 신께 올리는 기도를 준비하려고 자신의 외양을 다듬는
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기도를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은
다듬고 있는가 자문합니다. 내면을 다듬는 것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것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지요. 늘 그 시도를 하며 살고 있지만, 딱 부러진
정답 따위는 없다고 느낍니다. 나의 내면을 다듬자면 어젯 밤 꿈속에
나타난 숱한 상징들이 의미하는 내 마음의 그림자와 빛의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게 평생을 바쳐야 엥간한 결실을 이룰 수 있는
일일 것이라는 데에 이제 이해가 미치고 있네요. 그래서 해가 갈수록
융의 분석심리학 전문과정에 입문하고 싶다는 생각은 커지고 있지만,
현실에 얽매인 삶속에서 그럴 여유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는 '수행'을 계속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작년
한 해를 돌이켜 보면 힘든 시기도 많았으나, 모든 어려움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냈다는 점이 저로서는 기적과도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과정 속에서, 10년 대학 강의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학생들을
상대로 가장 많은 종류의 강좌를 맡았고, 결과적으로 한 강좌도 크게
실패하지는 않았으며, 대부분의 경우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작년에 내가 제일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첫 책도 출간했고,
나름대로 괜찮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도 들 수 있는데, 사실
따져보면 '내가 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저로선 자비로우신
신의 선물을 받았다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많은
학생들에게 대부분의 순간, 순간에 내가 가진 최상을 전달하기 위해
집중할 수 있었다는―실제로 전달됐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사실 또한
신의 은총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저의 신에 대한 감사의
염을 감상주의적이라고 여기더라도 어쩔 수 없지요. 오히려 저는 제가
지나치게 냉정하지는 않은가 반성을 할 때가 많습니다.
냉정하게
따져보니, 내가 '잘' 할 수 있었던 일들의 반면에는 내가 못 하고, 소홀했던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연락하고, 안부 묻고, 인사
올리고 하는 등의 일들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주변 친지들에게 인정
머리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생계와 학생들을 위해 나머지 관계들을
희생시킨 셈이지요. 겨우 아버지와 제 식구들만 챙길 수 있었죠. 저
자신의 몸뚱아리 관리도 소홀해져서 운동할 시간도 잘 못냈고, 정서적인
면을 돌보지도 못했으며, 휴식도 취하지 못해 몸이 부실해졌습니다.
그래서 둘째 책의 집필이 제대로 진전이 안되고 있는 듯 합니다. 다음
주에 계절학기를 끝내고 나면, 심신을 잠시 쉬게 놓아두고 싶습니다.
이런
휴식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늘어진 팔자이고, 비록 고되긴 하지만
벌어서 잘 먹고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질 사람들이
이 사회에 적지 않다는 점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이같은
축복 뒤에는 언제나 고통과 좌절 속에 하루 하루를 이어가는 나의 동족들이
같은 땅위에 숨쉬고 있다는 점을 잊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나의 행복과
은총이 미안합니다.
해가 갈수록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나의
영적인 초라함에 눈 떠 갑니다. 눈 뜨도록 도와주시는 신께 감사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