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해물 (2010/8/1)
©
Suk Hoon Han
1.
안정이라는 환상
요즘 젊은이들은 삶에서 '안정'을 구하는
경향이 높다고들 한다. 따라서 자기만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는
젊은이들을 보기가 어렵다고도 한다. 평소에 젊은 대학생들을 많이 대하는
나도 이같은 세평에 동의하는 편이다. 허나 그런 젊은이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모험과 개척의 대가는 인생 막장일 수 있다는 현실적 메시지를
우리 사회의 특이한 재벌 독점 경제구조와 그것이 강요하는 다수 '주변부'의
희생이라는 현상을 통해 우리는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접수하고 있다.
일례로,
소수에 의한 용감한 개척과 발명과 창의가 산업구조 속에 수용되고,
또 그에 합당한 경제적 보상을 가져다주는 미국의 IT업계와는 달리,
한국의 동일 업계에서는 전제군주처럼 군림하는 대기업의 횡포로 인해
창조적 소수의 탄생과 성장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관찰이 지배적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나'와 가족이라는 개체 수준의 생존을 보장할 현실적인 길은
그 재벌 독점 구조의 일원이 되든가, 아니면 공인된 자격을 취득하여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는 것뿐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나는 교사직이 성직이어야 한다는 당위를 고수하는 '교원 양성자(teacher
educator)'임에도 불구하고, 내 제자들이 직업적 안정성을 구하여 교직으로
진출하는 것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젊은이들이
'합리적으로' 안정만 구하고 있는 작금의 현상이 거시적 사회
수준에 끼칠 악영향에 대해 우려하기 이전에, 그것이 젊은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미시적 삶의 수준에 끼칠 악영향이 더욱 우려된다는 점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왜? 안정은 분명히 확보해야 할 삶의 조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완벽한 안정을 사람이 의도하여 구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정된 직업도 안정된 인생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불행과 도전은 모든 이의 인생에 수시로 등장하는 상수이고,
이를 죄다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두려움에 근거한 방어기제는 필히 좌절을
겪게 된다. 우리의 목적은 안정 그 자체가 아니라,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나'를 키우는 데 있어야 한다. 안정은 환상이고,
삶은 모험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믿는다. 따라서 환상만을 좇는 젊은이들은
장기적으로 좌절할 것이고, 뒤늦게 불안정에 대응할 수 없는 미성숙한
자신을 발견하고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 사람은 안정을 확보하는
습관적 근면함의 배양과 더불어 동시에, 변화하는 환경의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하고,
나아가 새 길을 개척함으로써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꿔야만 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에게 부과된 도덕적 요청이기에 앞서,
기본적으로 자연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하고 성장해야만 하는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현실적이고, 따라서 가장 실용적(pragmatic)이며,
그러므로 가장 본질적 삶의 자세이다.
사람은 인생의 여정
속에서 새 길을 개척해 나아가야 하는 계제에 이르게 될 때가 있다.
이런 계제는 사실 꽤 빈번히 나타난다고 나는 믿는다. 다만 그것들이
나타나도 많은 경우, 당사자가 그것을 개척의 계제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채, 관성적으로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게 되고, 따라서 개척돼야
할 새 경지도 사라져버린다고 본다. 대체로 이런 계제는 진학, 졸업,
이사/이민, 취업, 결혼, 출산, 이직, 퇴직 등의 자연스러운 인생 여정의
전환기에 나타난다. 각 계제에 처한 개인은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
나아갈 마음을 먹어야 하고, 이는 인간이라는 생물 종이 태고적부터
겪어온, 생활과 환경의 변화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응 방식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전근대적, 아니 고대의 환경에서는 이러한 계제가 주로 기후의
급변이나 식량 자원의 감소 등과 같은 자연계의 변화로 나타났을
것이고, 이에 성공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인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환경에서, 특히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 속에서는 생태학적 변화에 따른 개인의 생존이 체제 차원에서 어느
정도 보장이 됐고, 따라서 인류의 유전자에 각인됐을 변화를 극복하기
위한 개척정신이라는 역량은 그다지 활발하게 사용되지 못한 채 잠들어
있는 상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의 인생에는 여전히 새로운
도전과 과제들이 주어지는 바, 이것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여 스스로
극복하지 아니하고, 통념에 의해 주입된 관행적 반응으로 '안전빵'만을
고수하게 될 때, 그 개인은 자신의 본질적 역량을 사장시키는 것이고,
따라서 태어난 가장 고귀한 목적이라 할, '온전한 성장(자기실현)'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2.
개척의 방해물
윗 글은 새 길을 개척해가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고, 여기서부터는 새 길을 개척해 나아가기로 어렵사리
마음을 먹은 젊은이들을 생각하여 쓰는 글이다―나의 가까운 제자들
중에 그런 젊은이가 여러 명 있다는 점이 나는 매우 자랑스럽다.
우주의
신이 하찮은 인간의 삶이라는 게임 판에 던지는 운명의 주사위들은 몰인정하고
냉혹한 결과를 가져다줄 때가 적지 않다. 그래서 아무리 고귀한
용기를 내고 마음을 먹어 자신만의 새 길을 개척해 나아가기로 했다
하여도, 그 길의 초반부터 예상 못한 방해물과 맞닥뜨리게 될 수가 있다.
인류의 영성을 다루는 다양한 전통들에서는 그런 방해물들을 고난,
역경, 시험, 유혹 등의 개념으로 설명해왔다. 이런 시험이나 유혹의
가장 극명한 예는 붓다와 예수가 깨달음에 이른 뒤에 그들 앞에 나타난
엄청난 마귀의 위력 과시 같은 것에서 볼 수 있겠다. 이처럼 '방해물'들은
무시무시한 압박이나,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현실 상황이나, 힘겨운 역경
등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데, 그 방해물이 얼핏 보기에는 부드럽고 온순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나의 한 제자는 '안정'된 직장을 뒤로한
채 용감하게 자신만의 새 길을 개척해 나아가는 첫 발을 내딛었는데,
이 시기에 표면적으로는 도움의 형식으로 제공됐으나 본질적으로
개척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과 조우하게 됐다. 나는
제자가 겪은 이같은 방해물을
'obstacles in disguise'(위장된 방해물)라고 불러 봤다―'blessings
in disguise'(위장된 축복)와 대조하여. 나는 노골적인 방해물들이 위장된
방해물보다 대응하기 쉽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방해물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를 그에 대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겨 내야지'
하는 의지를 쉽사리 낼 수 있다. 반면에 후자는 얼핏 방해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다 당할 수 있다.
나는 그런 '부드러운' 방해물들을
여러 번 경험했다. 삶의 전환기에 처했을 때, 나 자신을 새로운
여정에 적응시켜보려 발심(發心) 했건만 그런 용기를 꺾는 노골적인
방해물과 직면해야 하는 경우들도 있었고, 또 나의 용기가 가상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표면적으로 친절한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상황과 접하게
된 경우들도 있었다. 부언컨대, 후자는 대비가 어렵다는 점에서 사실상
보다 악성의 방해물이라고 나는 간주한다.
과거에 한 번은, 나의
내향성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마음을 먹었던 일이 있었다. 그래서 집단
속에 들어가 의욕적으로 나서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벌여봤었다. 그런
활동에 익숙지 않은 나에겐 매사가 도전이었고 사실상 힘겨운 과정이었는데,
당시의 나에게는 너무도 고맙게도 집단의 보스가 나를 총애해줬다. 나는
젊었을 적부터 스스로를 기독교 구약에 나오는 요셉과 동일시 했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요셉이 보스들로부터 총애를 받았다는 점에 있었다. 나는
내가
강자에게 아부를 잘해서 총애를 받는 인간이라고 전혀 생각지 않고, 오히려
나보다 약한 이들을 칭찬해줄 소지를 열심히 찾는 인간이라고 믿지만,
실상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혹시 내가 아부의 달인일런지. 아무튼 보스의 총애
덕분에 나는 적지 않은 활동에서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위장된 방해물인 줄을 당시에는 눈꼽만큼도 알아채지 못했었다. 보스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그 총애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생성한다.
따라서 총애의 대상은 자동적으로 다수의 질시의 표적이 되기 마련이다.
덕분에 여러 구성원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몸에 받았고, 그 결과 나는 집단적,
조직적 활동이라는 것 자체에 더 심한 염증만 품게 됐다. 보스의 총애가
없었더라면 집단성에 대한 나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물론 젊은 시절부터 나를 총애해줬던 보스들에 대한 원망의
마음은 전혀 없지만.
또 한 번은, 내게 사회·경제적으로 큰 보상이
주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사업에 합류하게 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나는
교육을 통해 세상의 구원에 다가가자는 뜻을 품었었으나 현실적 삶이라는
큰 장벽 앞에서 허덕이고 있었는데, 그 사업은 일거에 그 현실의 장벽을
제거해주고 내가 본질적 소명에만 집중할 수 있을 조건을 제시해준 것이었다.
그 사업에 합류한 것이 또 다른 부드러운 방해물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꽤 소요됐다. 돈이 결부된 사업이 나의 소명과 연계되기란 대단히
어렵다는 교훈을 얻고 나만의 고독한 길로 되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많은
시간과 열정을 낭비해버리고 난 뒤였다.
이같은 부드러운
방해물들을 여러 번 겪고 패배해본 경험이 있는 나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제자님들에게 꼭 현실을 간과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이상이라든가 뜻을 펼치기 위해 위대한 선각들은 현실의 지리멸렬함에
눈을 감고 꿋꿋하게 자신만의 정도로 나아갔다는 일종의 신화(myth)가
세상에는 퍼져있으나, 그러한 개척의 길 구석구석에는 개척자들이 미세한
영역에서 영웅적인 노고로써 현실과의 접합점을 모색했던 흔적들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러한 노고를 존경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와 비슷한
다음의 충고를 예수께서 후대들에게 남겨줬다고 본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 예수, 마태오
복음 10:16
새로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기로 귀한 마음을 먹은 내 제자님들을 자비로우신
신께서 보호해주시옵기를 기원한다.
3.
방해물과 축복의 양면성
여기까지는 젊은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썼다. 이 아래는 나같은 중년의 길벗님들과 벗들을 생각하며
쓰는 글이다.
나는 언제나 세상 만사에는 축복과 방해물 양면성이
내재돼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견지해왔다. '부드러운' 방해물이 나의
참된 여정을 가로막는 악성 방해물로 밝혀졌을지라도, 비선형(非線型;
non-linear)의 시간의 축 위에서 볼 때 실은 그 방해조차 축복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사에는 모든 순간에, 모든 면에서, 축복과 재앙 양면이
저며있는 것만 같다. 나에게 주어진 한 사건이나 상황을 축복으로, 또는
방해물로 만드는 선택권을 내가 갖고 있을까? 글세, "만드는"은
어쩌면 너무 강한 어휘일지 모르겠다. 현 상황을 축복으로, 또는 방해물로
"보는" 선택권을 내가 갖고 있다고는 할 수 있을까? 나는,
양면 중의 어느 한쪽을 부각시키는가는 나의 선한 의지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나의 선한 의지를 일으키는 데 성공한다면,
거의 완전한 저주처럼 나를 습격한 사건이나 사람을 고귀하게 대함으로써
방해물을 축복으로 전환시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믿는다―물론
인간적으로 지난한 일이지만. 나의 선한 의지를 발휘할 수가 없다면,
실은 98% 축복으로써 주어져서 축복으로써 기능해온 사건이나 사람에게마저도 의혹과
불신의 태도를 투사함으로써 2%의 재앙이 주도권을 잡도록 만들어버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는 십년불공 도로아미타불이라고 하겠다.
문제는
'나의 선한 의지'가 의식 수준의 나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나의 선한 의지는 자의식이나 에고를 넘어서는 훨씬 큰 나이자
신과 맞닿아 있을 궁극의 자기(Self)의 동의 없이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거룩한 기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능의 작동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다―내 경우만 보자면. 다른 이들은 끊임없이
명상한다든가, 자기성찰한다든가, 기도한다든가, 종교적 봉사활동을
한다든가, 구도자적 연구활동을 한다든가 등의 자신에 맞는 수행의 방식을
지속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수행이 에고 수준의
나의 무력함을 자각하게 해주고, 나로 하여금 더 큰 나와 신 앞에
엎드려 절하게 해줌으로써 나보다 더 크고 고귀한 원천에서 선한 의지를
끄집어내줄 것을 기원한다. 선한 의지를 작동시킬 수 있을 때,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 속에 감춰진 축복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만사는 새옹지마 아니겠는가. 모든 축복은 재난의 씨를 안고
있고, 모든 재앙은 축복의 씨를 안고 있으므로.
그러나 새옹지마의
지혜를 이미 꿰뚫고 있다 하여도 우리는 축복에 웃고, 방해물에 울며
일희일비하지 않을까?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연극하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