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욕망, 창의성 (2010/6/12)
©
Suk Hoon Han
30년
가까이 못 풀었던 곡을 최근에 풀어냈다: 베티 미들러가 옛적에, 그러니까
내가 아직 청년이었던 시절에 불렀던 'The Rose' 를 Bossa Nova 리듬을
써서 피아노 건반 위에
풀어냈다. 성공이다. 보사노바가 '된다'는 것을 왜 그렇게 오랫동안 몰랐을까? 또 왜 갑자기 이제야 풀 수 있게 됐을까?
이런 것을 풀어낼 때 삶의 에너지가 넘쳐난다.
생기가 넘친다. 희열을 맛본다.
대학의 교육철학 수업
끝 무렵에 '존재론적 욕망'이라는 말을 여러 번 꺼냈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그저 참된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싶은 욕망을
일컫는 말이다. 참된 자기로 있을 때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이 드러나고,
그 개성은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딱 맞는 방식으로 표현될 길을 자연스럽게
찾는다.
그 길은 과학이 될 수도 있고, 춤이 될 수도 있고,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그림이 될 수도 있고, 요리가 될 수도 있고, 상품이 될 수도 있으며,
봉사활동이 될 수도 있다. 그 길은 아마도 무한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세상에 대한 최상의 서비스가 된다―왜냐 하면 내가 자연스럽게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므로. 나는
그러한 나만의 길중의 하나가 음악을 피아노로 편곡·연주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편곡은
작곡에 비해 창의성이 떨어지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내가
공부하는 방식이―즉, 이미 '발견된' 학문적 축적물들을 사용하고, 엮어서 학습자들에게
전달하는 '편곡' 수준의 방식이― 우주의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나가는
과학자들의 방식에 비할 때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나는 스스로를 2류 음악가, 또는 2류 학자로 간주한다는 말이다.
나는 나의 2류됨에 큰 자부심을 갖고 산다.
우주에 대한 지식을 넓혀가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나는 2류, 또는 3류에
불과하겠으나, 그러나 사람은 영적으로 평등하고, 따라서 이런 식으로
몇 류가 되든 상관은 없다. 또한 새로운 선율과 리듬의 조합을 창조해내는
작곡가에 비해 나의 피아노 편곡은 '취미' 활동 수준밖에 안되지만,
그도 상관은 없다. 수직적 우열은 현 사회문화에 속해 있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관점일 따름이다. 나는 그저 나만의 꽃을 피우면
되는 것이다. 나의 꽃보다 더 크거나, 화려하거나, 짙은 향기를 가진
수많은 다른 꽃들과
비교해야 할 필요 따위는 없다. 이것을 알게 돼서 나는
'내 분수'에 맞게 살 수 있게 됐다―헛된 외식(外飾)의 욕망으로 스스로에게
맞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대신에, 내 존재론적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불평, 불만 없이, 평화롭게.
그건 그렇고, 'The
Rose'가 왜 갑자기 풀렸을까? 이 곡의 오리지널 연주 방식인 단순하고
반복적인―그러나 대단히 파워풀한―
피아노 반주가 이끄는 방식을 나는 받아들이기 싫었고, 그래서
과거에
다른 방식을 몇 차례였던가 모색해봤지만 시원치 않아서 다 그만 뒀었다.
내가 피아노 연주에서 보사노바를 사용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약 20년 전에 '기억 속으로'라는 곡에 그것을 사용하여 당시의 청중을
대상으로 '힛트'를
쳤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전혀 없었다. 이번에도 몇십
년만에 우연찮게도, 전혀 무관한 듯한 남미 리듬을 섞어 넣었더니 문제가
풀렸던 것이다. 이걸 어떻게 알아냈을까? 그걸 난 모르겠다.
그
수준이 높건, 낮건 간에, 창의성이란 나의 밖에서 나에게로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신, 우주, 집단 무의식, 영계, 정령, 그밖의 어디로부터인가
내게 주어지는 더 높은 수준의 '창의'를 내가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이 시간과 사회와 문화와 가치관 등등에 연결돼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만 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먹고 살다보면 후자가 잘 안된다. 그래서 나이 먹을수록 창의성은 떨어지는가
보다. 갑자기 '차탈레이 부인의 사랑'을 쓴 D.H. 로렌스의 아름다운
고백이 떠오른다:
이것이 내가 믿는 것입니다.
나는 나라는 것.
나의 영혼은 어두운 숲이라는 것.
나의 드러난 자아는 그 숲을 조금 개척하는 것
이상은 결코 할 수 없으리라는 것.
신들은, 기이한 신들은, 숲에서 나와서 나의 드러난 자아가 개간해 놓은 그곳에 들렀다가 다시금
돌아가리라는 것.
나는 신들이 오고 갈 수 있게 해줄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
나는 결코 인류가 내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언제나 나의 내면과 다른 남자와 여자들의 내면에 있는 신들을 알아 차리고, 그 신들에게 복종하려
할 것이라는
것.
나의 신조입니다.
딜레마가
하나 있다. 존재론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나는 이 사회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을 수 없으나, 그 실현이, 즉 참된 자기를 완전히 가동시키는
일이 더 높은 차원에서 주어지는 창의성을 필요로 한다면, 나는 이 사회의
여러 굴레와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지 않고는 그 창의성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사회에 속하면서 속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이 이른바 '모범적인' 삶의 모습을 고수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차를 몰고 가다가 오랜만에 그룹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들으며 프레디 머큐리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존 레논의 삶의
여정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2류, 아니 3류의 창의성 정도나
감지하는 주제에 쓸데없는 고민이다. 만약에 내가 십대 때부터
피아노에 내 존재 전체를 바쳐서 그 길로 초지일관 밀고 나갔었더라면
혹여 적합성이 있는 고민이었을런지도 모르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