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그리고 그 안의 진짜 나 (2010/12/19)
©
Suk Hoon Han
1.
과거에
나가던 한 모임의 보스는 유명인사였는데, 나는 초면에 그의 업적을
대놓고 칭송했었다. 원래 아부 쪽에는 영 재능이 없는 내가 그리 했던
것은 내가 진심으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모임의 다른 이들이 그 순간 나를 아부에 능한 놈으로 봤다는 것을
그들의 표정과 말을 통해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건 말건, 때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뻔뻔해지는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내키는 대로 그 모임에서 행동했고,
급기야 동의할 수 없는 견해에 대해서는 보스마저도 대놓고 '까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사람들은 내가 '이권' 때문에 그 모임에 온 줄로
알았던 것 같은데, 나는 오직 '흥미' 때문에 갔었고, 흥미를 잃은 후로는
따라서 그 모임에 발을 끊었다. 세월이 오래 흐른 뒤 그 모임의
멤버들을 우연히 만나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들의 나에 대한 오해가
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남들이 규정하는 나는 이랬다, 저랬다 하고, 따라서
타인의 평 하나, 하나에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의 사회적
명성은 내 본심과 무관하게 형성되기도 한다.
2.
25년
전 쯤엔가, 사회학 시간에 연로하신 교수님께서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음 속에 더러운 것이 많이 있는 사람일수록
손을 자주 씻고, 구두를 반짝거리게 닦는다.' 20대 초반 젊은 나의 뇌리에
그 말씀이 박혔다. 그후로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손을
가끔씩만 씻고 구두 손질은 거의 하지를 않는다. 그런다 해서 내
마음 속에 더러운 것이 적다고 누가 인정해줄 리는 없다. 내가
그러는 이유는 '내가 나를 마음이 더럽지 않은 인간이라고 인정해줄
것'을 '나에게' 바라기 때문이다. 바보같은 바램이다.
3.
한
술자리에서 '꿀벅지' 운운하는 중년 남성들의 성욕에 대한 대화에
참여했다. 나는 '동물의 왕국'을 보며, 늙고 병든 채 한 구석에
쳐박혀서 젊은 암사자들을 바라보는 소외된 늙은 숫사자들이 매우 추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래서 내가 그런 류의 '퇴물'이 되는 것을 혐오한다.
차라리 그냥 속세를 떠나버리는 편이 낫겠다. 허나 일말의 의혹은 있다: 그것이
오히려 비겁함은 아닐까? 그보다는 저 추접한 중년, 초로의 남성들처럼,
침흘리며 젊은 암사자를 바라보는 비루먹은 늙은 숫사자로서 남아있는
것이 용기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설혹 그렇다 해도, 난
그렇게는 못 살겠다. 산속에 틀어박혀 초근목피 연명하다 죽으면 죽었지.
헌데 내가 이렇게 지키고자 하는 나의 존엄성(dignity) 역시 나의 사회적
자아, 나의 가면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 존엄성은 나의
고유한 자아에 귀속되는가?
4.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자신이 실제로 잘 할 수 있는 것은 다를 수 있으므로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실제로 잘 할 수 있는가는
내가 한 일이 타인에게 선한(good) 영향을 끼치는지 확인해봄으로써
잘 알 수 있다. 내가 선한 영향을 끼침을 확인할 때 나는 그 일을 더더욱
잘 하게 된다. 따라서 선함(goodness)을 추구하는 도덕성이 곧 실용(pragmatic)이다―어떤
일이 타인에게 봉사하는 도덕성을 함유하고 있는지
확인함으로써 내가 그 일을 더 잘하게 되므로. (When I am good to
others, I am good at that work.) 참된 실용(듀이的
프래그매틱)이란 결국 내 안의 참된
본성인 선함(goodness)의 드러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선생이 외친다: "당신의 시간은 제한돼 있습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아가며 그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시간 낭비는 비실용의 전형이다.
5.
제자 한 명을 정성을
다해 키워서, 그가 자신의 두 발로 세상에 우뚝 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뒤에는, 스승은 제자를 떠나보낸다. 제자에게 더 전수해줄
것이 없게 됐을 때, 스승은 비장한 표정으로 "이제 하산하거라"
명한다. 돌연 자신을 내치는 스승 앞에서 제자는 망연자실해 울며 다시
자신을 거둬달라 애청하지만, 등을 돌린 스승은 냉정하게도 제자를 내친다.
스승이 그렇게 냉정한 것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제자를 내치는 것은 스승에게는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사랑하기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제자가 더 커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어여쁜 제자를 자신의 곁에 두는 것보다도 스승이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은 제자가 더 크고, 더 훌륭해지는 것이다. 스승의 마음은 페르조나 안의 깊은
'나'에서 나오는 것 같다. 어쩌면 이는 세상의 모든 스승들에게 계승되어
온 인류의 종(種) 차원의 요청이 아닐까? 제자 한 명을, 나아가
인간을 업그레이드하라는.
6.
이 세상 모든
일이 그대가 의도하는대로 일어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들이
지금 일어나는 대로 진행되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러면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에픽테토스
내
내면의 참된 나는 이 같은 진리를 알고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