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

쾌락의 추구 (2010/6/20)

나는 삶에서 제공되는 즐거움과 쾌락을 긍정하는 에피큐러스적 자세를 좋아한다. 열심히 살다보니 즐거움과 쾌락을 누리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사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즐거움에는 중독성이 있어서 그 보급이 중단될 때 불만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삶의 부산물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즐거움과 쾌락을 감사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즐거움과 쾌락 그 자체를 찾아나서는 일은 그 끝이 꼭 허망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때때로 나는 즐거움을 찾아 나선다. 물론 사람이 일만 하며 살 수는 없고, 때때로 즐거운 것도 찾아 나서고, 쾌락도 향유할 필요가 있다. 단지 즐거움과 쾌락에 매혹당한 나머지, 그것을 선사해주는 일에 집착하게 되는 게 문제일 뿐.

이번 1학기에 가르친 학생이 오백 명에 이른다. 네 가지 다른 과목을 들은 그들 모두에게 논술 보고서 형태의 기말과제를 부과했는데, 아마 백 명이 훨씬 넘는 학생들이 내 수업을 통해 큰 도움을 받았고, 자기성찰을 할 수 있었거나,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의 코멘트를 보고서에 포함시켜 제출했다. 미국의 엄격한 교수님들로부터 훈련을 받은 나는 채점 시에 그런 코멘트를 철저히 제외시킨다. 그건 그렇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은 거다. 학생들의 감사의 말들이 달콤하다. 즐겁다. 내가 아주 훌륭한 선생이란다. 내가 멋지단다. 내게 카리스마가 있단다. 내게 반했고, 나를 사랑한단다. 물론 성적 부여권자에 대한 순수하지 못한 동기가 작용한 경우도 아마 있을 것이다. 하여튼 마지막 강의 때 눈물을 흘린 학생을 다섯은 봤다. 한 학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늘 나의 에고는 부풀어 오른다. 십 년 세월 속에 터득한 게 하나 있다면, 그렇게 부풀어 오르는 그 꼬락서니를 한 발짝 물러서서 조용히 지켜봐줄 수 있게 된 점이라고나 할까.

풍선처럼 팽창한 에고는 나르시시즘이라는 자기 도취를 유발시킨다. 이 기이한 도취는, 내가 거룩하거나 대단한 일을 지상에서 수행하는 신의 종이고 싶다는 '성자의 욕망'에 맞닿아 있다. 나도 지금껏 살며 이 세상의 다양한 쾌락들을 맛보고 느꼈지만, 내가 신의 특별한 은총과 돌봄을 받는 성자와 같다는 착각이 가져다주는 황홀함을 뛰어넘는 쾌락이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 근거가 착각인 이 쾌락은 따라서 가짜다. 그럼에도 이 '거룩한' 쾌락 때문에 세상의 수많은 성직자들이 미쳐버리고, 가장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이자 에고의 화신이 돼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타인들과 하나 됨을 깨닫는 이가 성자이거늘, 오히려 자신이 타인들로부터 분리된, '특별한' 은총을 받는 존재라는 착각에 빠지는 일이 모든 '성자 코스'에 반드시 등장한다.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에게 주어졌던 암흑과 같은 신의 침묵도 그녀가 품었던 '성자의 욕망'의 귀결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나는 소설 창작을 꾸준히 획책하고 있기 때문에 바쁜 일상 속에서도 전철 속에서라든가 이런 저런 공상을 시도하곤 한다. 12세기 유럽의 유명한 사랑 이야기인 석학 아벨라르와 제자 엘로이즈의 서간집을 이십대 때 접한 이래로, 내 소설적 공상 속에서는 사제지간의 스토리가 여러 갈래 전개돼왔다. 일례로, '만약에 매우 고고하면서도 제자들의 존경을 받는 노교수를 천하일색에 총명하기 그지없는 여제자가 사랑하게 된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따위의 공상을 펼쳐본다. '천하일색' 은 노교수의 남성성에 대한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고, 총명함은 그의 학자됨을 자극하는 강력한 매혹이다. 나의 시나리오에서 노교수는 아마도 그 유혹들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 교수가 진실로 성자처럼 고결하거나 도덕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양면의 이유가 있다. 첫째, 스스로 평생 소중히 여기고 지켜온 고귀한 스승상을 파괴함으로써 굳건히 다져온 페르조나를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의 크기가 여제자를 품는 쾌락의 크기를 능가할 것으로 그가 예상하기 때문이다; 즉, 그가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둘째, 스승상을 견지함으로써 여제자에게서 더 큰 존경을 받는 것이 제자를 품는 것보다 더 큰 쾌락을 줄 것으로 또 그가 예상하기 때문이다; 즉, 그가 플라토닉한―일상적 의미― 쾌락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과도한 쾌락주의 원리를 차용한, 지극히 이론적인 공상일 뿐이다―또는 육체적 쾌락에 대한 욕구가 상당히 감소된 노교수에게나 해당되는 경우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자신을 성자와 동일시하는 거룩한 쾌락의 유혹은 원초적 쾌락에 대한 유혹을 뛰어넘는 강력한 힘을 품고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말이다. 이건 성인(聖人)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부과된 천형(天刑)이거나, 아니면 그들이 뛰어넘어야만 할 지난한 과제이겠다.

11년 전, 대학에서 최초로 한 학기 수업을 마친 뒤에 기말보고서를 이메일로 받았을 때, 수십 명의 학생들이 찬사와 감사의 내용을 담아 보내온 글들을 처음으로 읽으면서 깜짝 놀라는 한 편, 에고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쾌감을 맛봤던 일이 떠오른다. 난 당시에 그러한 학생의 메일들을 전부 별도 보관함에 모셔뒀었다. 그러나 그후 여러 해가 지난 뒤, 수백 통의 찬사 메일이 쌓여있던 그 보관함을 삭제해버렸다. 내가 학생들의 찬양이라는 보상을 받기 위해 선생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이상, 그러한 찬양이 가져다 주는 쾌락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만 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에고를 부풀려주는 찬사를 받는 것은 누구나 좋아할 것이다. 허나 그 쾌락에 맛을 들이면 그 쾌락을 더 찾아나서게 된다는 점이 문제다.

'쾌락의 꽃을 따모으기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어느날 홍수처럼 덮쳐버린다.'
- 불경 구절

이러다가 죽는 거다. 이건 확실한 진리다.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즐거움에 눈과 마음을 닫는 금욕주의를 나는 거부하지만, '쾌락의 꽃을 따모으기'에 정신을 파는 쾌락주의 또한 거부한다.

온 세상의 왕이 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천상에 올라가기보다는, 세상의 온갖 보화를 다 얻기보다는, 깨달음과 고요에 이르는 첫 발걸음이 훨씬 좋지 않습니까? - 법구경

언제였던가, 세상이 주는 여러 가지의 즐거움을 맛보며 술에 취해 귀가하던 전철 속에서 무심코 끄집어내어 본 메모지에 이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깨달음과 고요에 이르는 첫 발걸음이 훨씬 좋지 않습니까?'라는 구절을 계속 중얼중얼 되뇌며 집으로 향하는 어두운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알코올의 효과때문이었을까, 걸어 올라가는 내내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깨달음과 고요에 이르는 첫 발걸음은 지상 최고의 쾌락이었고, 그것을 기억해내는 것은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예리한 고통이었다.

모든 쾌락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것이 아무리 원초적이건, 또는 아무리 지고해보이건 간에.

<6/21의 첨가 >

저 위에서, 아직 소설 속 인물로 제대로 탄생도 하지 않은 '노교수님'을 너무 못되게 그린 것 같다. 그가 이기주의자거나 정신적 쾌락주의자일 가능성 말고도, 훨씬 아름다울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그래도 여기가 명색이 '수행'을 논하는 웹싸이트이거늘... 예컨대, 노교수가 제자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그의 참다운 본성의 발로일 수도 있겠다.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여제자가 자신과 같은 늙은이와 모종의 관계를 만든다는 것은 세상의 이목이나 윤리관 등은 차치하고라도, 그 제자의 인생에 파괴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더 좋은 자신의 길을 찾아가라고 제자를 내칠 수도 있겠다. 이 정도 되려면 진심으로 그 제자를 사랑해야만 할 것 같다. '내가 어떻게 너에게 나쁜 것을 줄 수 있겠니' 정도가 제자를 내치는 장면의 적절한 대사가 될런지... (좀 신파조인 듯.) 또는, 노교수가 진정한 고수 수행자일 경우도 상상해볼 수 있다. 여제자의 '귀여운' 모습에 싱긋 웃어주고, '얘야, 네가 아직 인생을 모르고 철이 덜 들었구나. 너에게 진정으로 내가 필요할 그 때에 다시 돌아오겠노라' 하며 떠나는 장면은 어떨지―늙은이가 갑자기 어디로 떠날 데도 없겠지만.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예전에 싸이트에 올려놓은 '때가 되면 그대에게 가리라'라는 아름다운 글을 떠올리며 생각해볼 수 있었다. 노교수님, 미안.

어쨌든 여기까지 제기된 이 노교수의 네 가지 반응 시나리오에 비할 때, 프랑스의 석학 아벨라르는 그야말로 '죽일 놈' 수준에 머문다. 20년 연하의 장래가 촉망되는 아름다운 여제자에 홀딱 빠져서 공부는 안 가르쳐주고 맨날 쎅스만 요구했다고 하고(요즘 기준으로 보면 '원조교제' 수준), 그래서 처녀 제자를 임신시켜 놓은 뒤에 분노에 찬 처녀 집안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거세까지 당하고... 요즘 성범죄자들에 대한 화학적 거세 논의가 제기되고 있던데, 아마 '물리적' 거세는 최근 우리나라 텔레비전의 '막장 드라마'에도 아직 등장하지 못한 참신한(?) 소재일 것 같다.

헌데, 소설 스토리가 되려면 적어도 이 정도 '막장'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21세기의 소설이 12세기의 실화 수준의 막장도 못 쫓아간다는 건 아무래도 좀... 제자를 진심으로 위한 나머지, 할아버지가 '사랑했기에 헤어졌다네'라며 눈물 짓고 돌아선다는 극 전개는 끔찍한 상상력의 빈곤으로밖에 안 보인다. 이런 걸 두고 '창작의 고뇌'라 칭한다면 길 가던 개가 웃을 일이지. 내 표현이 거칠어지는 건 기말 성적 처리의 업무량 때문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창의성 부족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스토리를 막장으로 끌고 가려 한다는 것은 본질적 주제를 담을 적합한 이야기를 창조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 터이니.

후-, 언제 '일' 다 마치고 이야기 창작의 고뇌에 빠져볼까.

'수행일상 2010'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