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점검

정기 점검 (2010/6/2)

1.

작년 이맘 때, 출강하는 학교 수가 늘고 수업량도 늘어나자 나의 육체와 두뇌가 꽤 힘들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전까지 '프리랜서'로 제멋대로 자유롭게 일하고 놀며 살다가 갑자기 매일 '출근'해서 몇 시간씩의 일을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는 상황에 적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의는 갈수록 늘어나서 지금은 작년의 세 배 정도의 일을 하고 있다(따라서 수입도 두 배 이상 늘었다). 지난 2월말, 신학기 강의 시간표를 쳐다 보면서 이렇게 한 마디 내뱉었다: "난 이제 죽었다."

그 신학기가 이제 거의 다 끝나간다.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진리를 또 한 번 깨우쳤다. 학기초엔 보약이라도 달여 먹어야 할 것 같다고 겁 먹었었지만, 보약 안먹고도 충분히 버텼다. 아니, 버티는 정도가 아니라 이젠 아예 여유까지 생겨서 수업 외로 학생들 상담도 받아주고, 강의도 헐떡이지 않으며 본래 페이스 대로 순조롭게 한다(때로는 '청중'과 라포(rapport)를 형성하여 상호 감응하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5월에는 1박2일 여행도 다녀왔다. 사람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임에 틀림없다.

성공적으로 적응하다 보니 예의 오만함이 또 고개를 치미는 것 같다. 수업 때 학생들과 토의를 몰고 가면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건방진 '멘트'를 날렸다.

"상처받은 이가 치유한다."

"너의 인생이 스스로 너에게 알려 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없다."

"욕심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다."

이러고 있는 나를 유체이탈하여 바라보고 있는 제2의 나는 피식 웃으며 다음과 같은 '멘트'를 스스로에게 날린다: '새끼, 말 하나는 번드르르하게 잘 한다.'

자신을 간혹 이렇게 까는 걸 보면 나는 언행일치가 잘 안되는 인간인가 보다―세상의 거의 모든 다른 이들처럼.

2.

최근에 가까워진 한 사람이 있는데, 지금 나는 그를 나의 붕(朋: 이상을 나누는 벗)으로 간주한다. 중년 들어서 사귀게 된 붕, 즉 '길벗'님들과 나누게 된 우정은 내 인생 여정 속의 보물이다. 어릴 적부터의 벗인 우(友)도 귀하고, 늙어 사귄 붕도 귀하다. 성리학적으로 말하자면(깊이 알지도 못하지만), 友는 氣가 통한 벗들이고, 朋은 理가 통한 벗들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즈음 들어 생활이 너무 바쁘다보니, 이 새로 사귄 길벗님께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을 제대로 주지 못한 채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심, '이 정도는 내가 챙겨줘야 하는데...' 라는 다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던 차에 흥미로운 꿈을 꿨다.

꿈에서 그 길벗님이 내 집을 방문했다. 그는 우리집 식구들과 잘 적응하여 편히 집안에 자리를 잡았는데, 나는 왠지 몰라도 마음이 조급하여 그에게 내가 해줄 일을 빨리 '해 치우려' 한다. 손님인 그와 대화 시간을 갖기 위해 음료수를 준비하던 나는 부엌 찬장에서 투명한 플라스틱 물컵을 찾지만, 아무래도 보이지 않아 부엌에 있던 아내/어머니에게 그 컵들이 어디 있냐고 묻는다. 그녀는 "찻잔?"이라며 되묻는다. 나는 "아니, 찻잔이 아니라 플라스틱 물컵"이라고 정정한다. 그러나 그녀는 또 다시 "찻잔?"이냐며 묻는다. 내가 또 정정했으나 그녀는 또 다시 "찻잔!"이라고 엄중히 선언한다. 그녀는 "찻잔"이라고 세 번 말했다.

새로이 알게 된 길벗이 내 집을 방문했다는 것은 내 의식 세계(집)에서 그가 비중 있는 인물로 자리매김했음을 뜻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식구들과 잘 어울렸다는 것은, 그가 나의 내적인 지향성에 잘 부합하는 인물, 즉 '코드가 맞는 사람'이라는 뜻일 게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 내가 알게 된 그의 성향이 잘 설명돼있다. 그런데 내가 플라스틱 물컵을 찾는다 함은 내가 그와의 관계를 기능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효율적으로 빨리 처리하고자 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변명이지만, 붕으로 여기게 된 그에게마저 이런 태도를 갖고 있을 만큼 최근의 나의 삶은 정신없이 바빴고, 고단했다. 부엌의 '아내/어머니'는 아니마(내 안의 여성성으로, 일종의 신의 메신저)임에 틀림 없다고 본다. 처음에는 잠시 아내의 모습이었으나 금세 돌아가신 어머니 모습이 돼있었으며, 외양 뿐 아니라 풍기는 모든 느낌이 지금까지 수 차례 내 꿈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아니마의 그것과 일치했다. 차갑고 냉정하지만 나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고, 나에게 어떤 방향 제시 같은 것을 해주는 마음 속의 존재가 바로 나의 아니마다. 바로 그 아니마가 플라스틱 물컵을 찾는 나에게 '찻잔'이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한다. 세 번 씩이나 들으니 조금 짜증이 났지만, 나는 별 수 없이 수긍하고 찻잔을 사용하기로 했다. 플라스틱 물컵과 대조되는 '찻잔'은 무엇을 상징할까? 나는 찬 음료나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을 좋아하고 찻잔을 홀짝거리는 것을 기피한다. 커피도 거대한 머그 잔에 담아 마셔야 성이 찬다. 아마도 찻잔이란, 내가 선뜻 마음이 내켜서 손길을 뻗지는 않을지 몰라도 실은 내게 중요해서 조금씩 서서히 오랫동안 키워가야 하는 인간 관계를 뜻하지 않을까 싶다. 기능적으로 빨리 써버리는 플라스틱 물컵이 아니라, 고히 두 손을 받들고 천천히 음미하는 공을 들여야 하는 찻잔과 같은 관계를 나의 새로운 길벗과 만들라는 신의 메시지를 나의 아니마가 친히 전해줬던 것은 아닐까?

이 꿈 이후로,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이 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난 이후로 나의 새로운 길벗에 대한 내 태도가 조금씩 바뀌어 갔다. 단 시일 내에 내 '서비스'를 다 제공해버림으로써 하나의 프로젝트를 일단락짓는 식으로 그를 대하지 말고, 그를 귀히 여겨 오랫동안 서로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성장시켜야 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선회했다.

3.

'교육학 개론' 수업 시간에 교사의 본질적 소임에 관해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숭앙하는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에 대한 영상 자료를 함께 감상했다. 일본의 '비행' 청소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바친 그가 청소년 한 명, 한 명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 다시 한 번 영상으로 시청하면서, 지금 여기에 내 앞에 있는, 나를 필요로 하는 영혼에게 다가가는 수행자의 자세가 어때야 할지 새삼 자문하게 됐다. 미즈타니 선생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아이에게 매일 찾아가서 밤을 같이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는 정성을 쏟아부었다. 그것과 비슷한 일을 나는 해본 적이 없다. 그런 주제에 학생들에게 삶과 사랑의 본질이 뭔지 아는 척을 한다.

이런 게 부끄럽긴 해도, 그래도 나는 노후 설계와 재산 증식 등에 대한 근심으로 지금 이 순간을 낭비해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내 최상을 온전히 다 바칠 때 나의 미래는 스스로를 형성해갈 것이라고 믿고 산다. 노후 설계 다 돼있고 수입도 넉넉한, 안정된 신분의 대학 교수들이 '실적'의 압박에 내몰려 과로하고 있지만, 나는 그런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오직 본질적인 일들만 열심히 (과로)하며 살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막강한 자부심 같은 게 내게는 있다. 사실 나는 내 공부와 수업 준비에만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붓고 있다.

물론 이런 자부심은 허영이다. 나르시시즘의 소산이기도 하다. 아마도 타고 난 나의 성향이 그러한가 보다.

영적 허영에 들뜬 인간은 언설에 과장이 깃든다. 사실 나는 내 공부와 수업 준비 이외에도 가족 돌보고, 딸들과 나들이 하고, 술마시며 노는 등의 일(?)에도 꾸준히 내 시간을 쏟아붓고 산다.

4.

몇 만 킬로 마다 자동차 정기 점검해주듯이 사람도 때때로 자아의 정기 점검을 해줘야 한다. 나는 고장이 잘 나서 점검을 자주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행일상 2010'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