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눈 (2010/2/24)

올 겨울에는 예년보다 눈 볼 일이 많았다. 지난 달의 폭설 때엔 서울로 가는 지상, 지하 노선이 모두 막혀, 계절학기 수업을 하루 빼먹기도 했다. 폭설 시에는 지하철을 이용하면 된다는 국가원수의 친절한 조언에 힘입어 전철역으로 밀려든 서울시민들 덕분에 며칠 간 지하철마저 파행 운행되던 그때, 나는 출근 시간이라도 늦어 그럭저럭 학교까지 나가 강의를 할 수 있었다. 그때 출퇴근 생각하면 정말 미운 게 눈이었지만, 대학 캠퍼스에 쌓인 눈은 원래는 이렇게 아름다웠다.

나뭇 가지 위에 쌓여있던 눈이 바람에 흩날린다. 평상시보다 곱절 이상 많은 수의 학생들을 상대하여 주중에 나흘을 먼 학교까지 출근하며, 정신없이 한 달 안에 전 학기 과정을 마치고, 채점하고, 종결지어야 하는 캠퍼스의 3D 업종인 계절학기. 학기가 끝나고 받은 급여는 평소보다 5만원 더 많았다. 한국 대학들의 비인간성에 대해서 이제는 쓴웃음밖에 안나온다. 형편없는 보수의 시간강사 일을 그러나 나는 아주 사랑한다. 보수만 제외하고는. 내가 설혹 백만장자였더라도 일주일에 두어 번은 시간강사 일을 하려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 여자대학교 캠퍼스. 이 대학에 대해 우리 사회에는 편견이 많다. 나는 분석심리학 개념에 의거해, 이 대학에 대한 편견과 비호감이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투영하고 있다고 본다. 바꿔 말해, 한국의 경쟁사회에서 실패와 좌절의 쓴 맛을 본 많은 이들 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이 자신의 사회에 대한 원한, 또는 컴플렉스를 이 여자대학에다 투사하고 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물론 이 대학 출신으로 허욕과 영달의 화신이 된 인물도 꽤 있다. 허나 그건 다른 어느 대학 출신을 봐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가장 큰 적은 여성인 경우가 많다.

겨울방학 동안 소담스러운 눈이 내린 다음 날에는 꼭 집 근처 청계산 골짜기를 찾아갔다. 내가 찾는 이 골짜기 등산로는 대단히 한적하여, 어떤 때에는 정상인 매봉에 이를 때까지 등산객과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경우마저 있다. 은둔고립형 인간인 나에게는 최상의 산책 길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 겨울 동안 전혀 은둔하지 못하였다. 작년 연말에 벗과 지인들과의 만남을 미뤄뒀던 것이 올해들어 봇물이 터지는 바람에, 2월에는 이틀에 한 번씩 누군가와 만나 술 자리를 가졌다. 은둔은커녕 떠벌이 술꾼이 돼버렸다.

내가 사람을 좋아하지만, 스스로 사람들을 찾지를 않는다. 그래서 본성은 은둔형이라 함이 정확하다. 너무 빈번히 많은 사람들과 만나 떠벌리다 보면 영혼의 에너지가 급속도로 고갈됨을 느끼는 '까칠한' 성격의 인간이다. 그래서 다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산속의 조용한 길을 찾아온다. 어떤 이는 혼자 있다보면 에너지가 소진돼버리는 반면에 나같은 이는 그 반대다. 저마다의 다양한 개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함이 옳다고 본다. 내 본성에 맞도록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혼자 은둔해있을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은 신께서 내게 주신 크나큰 은총이라고 믿는다.

눈 덮힌 산속에 혼자 있으면 메말랐던 영혼의 에너지가 충전될 뿐만 아니라 '원래의 나'라는 존재를 새삼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원래 하기로 돼있던 일'에 관한 성찰이 재가동되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Where am I going? 나는 가끔 이런 식으로 자문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가고자 했던 쪽으로 방향을 잘 잡아서 계속 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관성에 의해서 그냥 가던 길을 맹목적으로 가버리고 만다. 처음에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가야 원래의 목적지에 다다를 것이다. 생존은 목적이 아니었다. 생존은 목적지로 향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이었을 뿐이다. 원래의 목적은 생존 너머의 고귀한 나의 발현이었다.

집을 나서서 차로 십여 분, 또는 자전거로 삼사십 분 거리에 의왕 백운 저수지가 있다. 눈 내리던 주에 딸내미들을 차에 싣고 이곳으로 와서, 찬 바람 함께 맞으며 저수지 둘레를 한 바퀴 걸었다. 눈이 다 녹은 며칠 전에는 겨우내 쉬고 있던 자전거를 꺼내어 타고 이곳에 왔다. 오늘 쯤에는 저수지의 얼음이 다 녹아 검푸른 물빛이 드러났을 게다. 얼음과 눈이 녹고 있다. 겨울이 가고 있다. 사라져가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 또한 새로이 피어나는 것들도 모두 아름답다. 다음 주에는 새로 돋아나는 젊은이들 수백 명을 상대하여 새학기 강의를 시작할 것이다. 되짚어보면 실로 우여곡절 끝에 출강하게 된 대학들이고, 맡게 된 수업들이다. 나는 열심히 강의하고 그 보수로 사랑하는 내 식구들을 먹여살릴 것이다. 그리고 교육이 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다가갈 지식과 정신의 주체로서의 '나'를 잘 가다듬을 것이다. 나를 가다듬는 '학기 사전 준비' 과정에 새로운 지식의 발굴은 별로 포함돼있지 않다. 사전 준비 과정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여기에 도달했으며, 그래서 앞으로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여기까지 오도록 잘 보살펴 주신 신에 대한 감사의 염이 피어오른다. 여기까지 오던 그 길의 방향을 다시금 제대로 잡아 그 연장선 상에서 계속 갈 수 있도록 만사를 보살펴주신 신께 감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정이 된다.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감사하면서, 새 학기에도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어리석은 이 인간이 유혹에 빠지지 않고 가고자 하던 길을 착실히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청하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당시에는 투덜댔지만, 이번 겨울에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던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린다.

'수행일상 2010'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