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10/4/4)
©
Suk Hoon Han
올해는
봄이 힘겹게도 온다. 추위도 집요하게 남아있고, 3월 말에 폭설도 한
차례 왔다. 충남의 대학에 다녀오다 고속도로에서 폭설에 포위되어 5시간
가까이 찻속에서 전전긍긍했다. 하찮은 개인의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하늘의 불친절함 말고도, 인간세상의 죄악과 비극의 소식들 또한 봄맞이를
힘들게 한다. 천주교 주교회와 조계종 종단은 정부의 4대강 개발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권력자의 아집과 기득권층의 이기적 탐욕이 이 땅을 결딴내버릴
수도 있다는 인식을 보수적 종교 지도권마저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게다. 그러나 힘있는 자들의 안하무인은 조금도 변함이 없고. 그런
와중에 군함이 침몰하여 수십 명의 젊은 생명이 덧없이 수몰됐고, 전국
각지에서 들려오는 어이없는 사고 소식들, 자살한 톱스타 누나를 따라
목숨을 끊은 젊은 연예인 소식 등으로 봄을 맞는 의식의 상태가 몽롱하고도
음울하다. 잔인한 4월이런가.
그러나 나의 3월은 잔인하지 않았다.
아니, 대단히 관대했고 자비로웠다. 학기 초에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머나먼 학교의 1교시 수업에 연일 나가며, 하루에도 여러 대학을
전전하면서 기록적인 양의 강의를 '뛰는' 일에 익숙해지기가 좀 힘들었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아직까지 단 한 번의 수업도 실패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다보니 새로운 업무량에도 적응이
돼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엄두도 못냈지만, 이제 그많은 학생들의
얼굴이 개별적으로 눈에 들어오고, 여러 학생들의 이름까지 기억할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업무량'을 고려하여 몸을 사리고 소극적인 강의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피곤할 듯 했다. 몸은
좀 고되지만, NBA 농구 선수가 한 번에 한 쿼터씩 최선을 다해 길고
험한 플레이오프를 완수하듯, 매주 '한 번에 한 주씩'이라는 모토로,
마치 이번 주가 내 삶의 마지막이라기도 한 듯이 수업에 나를 온전히
바치다 보면, 보람 찬 한 주일을 마치는 금요일이 행복해진다. 그리하여
폭설에 반나절 갇혀 고생한 일 빼놓고는 매우 평화롭고 순조롭게 신학기의
도입부를 통과할 수 있었다. 신께서는 언제나처럼 매우 자비로우셨고,
나는 마치 바깥 세상의 음울함은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일인
듯 신께 감사를 드린다.
이미 진행시켜 놓은 다음 책들의 원고
여러 편이 계속 보류·답보 상태이거늘, 이젠 그 따위 책일랑
그만 쓰고 '실용적인' 논문이나 좀 써서, 고달픈 보따리 장사 접고 아무
대학에든 정착하라는 가까운 지인의 강력한 종용에, 묵혀뒀던 연구 논문들을
끄집어내서 다듬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학의
자리를 외면해온 주된 이유가―게으르고도 독단적인 내 기본 성정을
제외하자면―그놈의 쓸데없는 논문들 억지로 써내서 '점수'를 받지 않는
한, 학자로서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작금의 대학 풍토와 문화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곳으로 기어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답답한 노릇이긴 하다. 아무튼 이같은 새로운 요청도
있고 해서,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이 봄이 더욱 바빠졌고, 주말에 뒷산에라도
잠시 다녀올 짬내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토요일인 어제는
교묘하게 낮 시간에 짬이 나서, 두어 시간 동안 청계산 산자락을 거닐
수 있었다. 한달 여만에 가보는 그 산길이 어찌도 상냥하던지! 두 시간도
채 못되게 그 안에서 노닐었을 뿐이지만, 잠간의 산책만으로도 머리에
쌓여있던 정신적 침전물들을 방출해버린 듯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산 부근에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늘로부터 이토록
많은 것을 받기만 하고 살아온 나로서 더 이상의 소원을 품는다는 것이
염치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저자 거리를 벗어나서 조용한 산기슭에 집짓고
살아보고 싶은 마음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잠간의
산행으로 얻은 마음의 휴식은 비길 데 없이 달콤했다. 일요일인 오늘도
할 일은 산적해있지만, 낮에 딸내미와 공도 차야 하고, 아버지 아파트에
가서 살림살이의 잔 고장도 손봐드려야 한다. 해서, 오늘은 아마
밤늦게까지 다음 주 강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어제의 휴식이 매우
요긴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많은 업무량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스트레스는커녕, 매일 아침 강의실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언제나 가볍고 상쾌하다. 어쩌면 '선생질'이 내게는 천직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천직일지도 모르겠다고 여길 수 있는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 축복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꼭 여러 권의 책들을
써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도 꽤나 욕심이
많은 인간인 것 같다.
올 봄은 더디고도 힘겹게 다가왔고, 이땅의
4월은 잔인하건만, 제 욕심이나 챙기고 사는 나라는 인간은 희희낙낙이다.
그것이 조금 미안하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라도 내가 나눠줄 수
있는 것들을 나눠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