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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사랑하라 (2010/3/1)
©
Suk Hoon Han
십년
전의 초월 체험 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최초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열심히 종교 서적과 신비주의 자료를 구해 읽으며
공부하고, 명상하고, 기도했다. 그 당시, 나에게 악감을 품고 온갖
피해를 입히던 원수같은 이를 충분히 응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털끝 만큼의 앙갚음도 하지 않은 채 용서해줘버리는 기적같은 행동까지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살다보면 머지 않아 성자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또 다시 어떤 이를 증오하게 됐다. 머리로 그를 용서하려
해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자책하고 기도하고, 신께 도움도 청했다.
허나 그에 대한 나의 증오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내 곁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알게 됐다. 이제는 그 혐오스러운 인간과
더는 마주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었다. 그때 내 속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의 명령을 전혀 완수하지 못하고 있음은 익히 자각하고
있었고, 내 '이웃' 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그저 그런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의 성자 등극 코스의 환상에서 깬지 오래였지만,
그 정도의 시원함을 느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스스로에게
놀라 내 안을 세심하게 살펴봤다. 증오하던 이가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
해방감을 느끼던 나의 마음은 매우 정직했다. 정직한 그 마음 안에는, 심지어
그가 사고를 당해 죽어서 사라졌다 해도 똑같은 시원함을 느낄 것이라는
생각마저 담겨 있었다. 내가 사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자 코스는
커녕 악마 코스를 밟고 있었다.
늘 성자 코스와 악마 코스를
함께 밟고 있는 것이 나의 실상이겠다. 나의 악마스러움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내 안의 지선(至善)이라는 본질을 밝혀준 신과의 만남
덕분에 나는 여전히 '성자 코스'가 본령이고 '악마 코스'는 그림자 허깨비임을
믿고 산다. 문제는 믿는다고 해서 내가 성자 코스만 밟고 살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겠다. 실질적인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써 나를 보호해줄 단단한 갑옷을
둘러입는 것을 고려해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갑옷이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보호하려는 소극적 자세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은 찌질한 자기 보호책이나 찾는
모드를 극복하여 최상의 나로서 사는 것을 뜻한다. 내가 최상을 발휘하며
살 때, 나는 '이웃'에게 피해를 입고, 상처받고 하는 등의 사소한 일들에
대해 신경쓸 겨를이 없게 된다. 내게 가장 중요한 일들을 더없는 성실함으로
완수해가며 충실한 삶을 살고 있을 때, 작은 상처나 부여잡고 투덜대는
찌질이 '나'를 떨쳐버리게 된다. 그래서 내 할 일 잘하며 잘 살기로
했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웃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초월하여 내 일이나
잘하며 살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 수업 준비하고, 강의하고, 학생 지도하고,
시간을 쪼개 내 글 쓰고, 공부하고, 그리고 가족 돌보고, 벗들과 만나고,
그렇게 매사에 나의 최상을 바치며 살다보면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
쯤은 하찮게 돼버린다. 상처를 회피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적극적 삶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일랜드가 잉글랜드에게 역사적으로
굉장히 박해를 많이 받아서 전통적으로 아일랜드인들의 영국에 대한
적대감이 심했었는데, 그 적대감이 최근들어 급격히 사그러졌다고 한다.
관찰자들은 아일랜드가 경제적으로 영국을 뛰어넘는 강국이 된 것이
그 주된 이유라고들 평한다. 이 분석의 정확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일례로
한국인이 일본을 용서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강하고 커져야
할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나를 괴롭히는
'이웃'을 용서하고, 그에 의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내가 강하고 커져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내가 강하고 커진다는 것이
육체적으로 힘이 세져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내가 내
최상, 최선을 발휘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내 일을 아주 성실히
수행해서 만족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때에 제대로 사랑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본질인 사랑으로 살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람 일이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겠다.
서로를 상처입히는 고슴도치 같은 이들은 서로로부터 떨어져서 사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겠다. 멀리서 사랑할 수 있는 관계도 있다. '사랑만
있으면 다 된다'는 식의 열혈 순수주의를 파기하고, 육체적 분리와
같은 편법의 실리를 옹호하는 나는 사랑을 할 자격이 없는 인간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성자들끼리도 반목하는 것이 인간 세상인만큼, 저 가증스러운
이웃이, 저 사랑할 수 없는 이웃이 실은 영적인 도반으로 내 삶에 주어졌음을
영육으로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는 일단 나를 키우고, 내 영성을 키우는
데에 집중하는 편이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