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노년에 대한 기원 (2011/3/27)

3월 말의 어느 날,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맥주를 홀짝이며 멍청하게 저녁 뉴스를 보고 있었다. 세계는 일본 발 방사능 공포와 리비아 내전 등으로 시끌법석한데, 우리나라는 학위 위조 사건으로 형을 살고 나온 신 여인의 폭로성 책 이야기로 왁자지껄하다. 얼핏 들어봐도 과연 그녀가 그 책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자 했는지, 아니면 세상에 복수함과 동시에 세상의 이목을 다시 끌어서 '명성'과 돈을 움켜쥐고자 했는지 헷갈리게 하는 선정적 내용이 대부분인 듯 하다. 암튼 이 책으로 당장 전직 총리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고, 그밖의 여러 저명 인사들이 졸지에 파렴치한, 또는 성추행범의 오명을 덮어 쓸 위기에 처하게 됐다. 죄다 늙은 남자들이다. 나는 뉴스를 보며 우울해졌다. 그들은 모두 최고로 배웠다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인사들 아닌가. 물론 신 여인의 폭로 사안들이 사실인지는 내가 알 수 없으나.

이날의 '잔혹한 노년' 뉴스는 계속됐다. 서울 신림동에서는 밤길에 50대 후반의 남자가 20대 여성을 각목으로 무참히 폭행하고는 18,000원을 강탈해 도망쳤다가 잡혔다. 강남의 한 호텔에서는 50대와 60대의 모범 택시 운전사 두 사람이 다투다가 높은 곳에서 함께 떨어져 사망했다. 오륙십대의 늙은 남자들이 딸 뻘인 여인네와 '놀아나'고, 여인네를 '꼬시고', '덮치'기도 하고, 강도 짓을 하질 않나, 서로 싸우다 비명횡사까지 한다. 십대 '비행 청소년'이 문제가 아니다. 애들은 학원에서 열나게 공부하고 있다. 문제는 오륙십대의 '비행 노인'들이다. 이같은 관찰은 내 기분을 침울하게 만들었다.

나로서는 지난 한 주가 우울해 할 만한 기간이 전혀 아니었다. 지난 한 주처럼 여러 사람들에게서 찬사와 갈채를 받은 적도 별로 없었다. 여러 명의 학생들로부터 '찬양서'에 근접하는 글과 메일을 받았고, 더 많은 수의 학생들로부터 도움을 준 데 대한 감사의 연락을 받았으며, 존경하는 학자분으로부터는 내 책에 대한 극찬을 듣기까지 한 나는, 일주일 내내 에고가 풍선처럼 팽창하여 득의양양, 그꼴을 나 스스로도 봐주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노인 잔혹사'가 뉴스에 펼쳐진 이날, 나는 우울한 기분이 됐다.

무엇보다 그 못난 늙은이들이 지금 이 순간의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세상과 인생에 대한 냉소와 불신만 잔뜩 심어놓은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마치 나 자신은 세상 한 구석에서 젊은이들에게 세상은 살아볼 만 한 것이고 인생은 필히 아름다운 결실을 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열심히 돈도 못 벌며 노력하고 있는데, 돈과 권력을 다 누리는 저 늙은이들이 그러한 내 노력을 무효화시켜버렸다는, 일종의 피해의식과 과대망상증세가 조합된 감정마저 빚어진 듯 하다.

헌데 과연 '깨끗하게' 젊은 학생들만 가르치며 사는 '교육자'인 나의 노고가 무효화되고 있는 것 같다는 자아팽창적 우려로 인해 내 기분이 침울해졌을까? 따져본 즉슨, 그러하지 않음을 쉽사리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너무 심한 자학증일런지도 모르나, 나는 저 노인네들에게서 나의 미래의 수만 가지의 가능성들 중 몇 가지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던 것이다. 내가 그들과 비슷해지기라도 할까봐 두려워서 우울한 것이다.

난 결코 그들처럼 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될 리가 없다, 난 반드시 성공적인 노화를 이루어내고야 말리라 입속으로 되뇌어보지만, 그러나 여전히 추잡한 늙은 사내들의 소식은 무거운 내 기분을 털어주지 못한다. 육신의 영달 수준을 뛰어넘는 경지에 대한 희망을 무력화시키는 이 사회의 '어른'들을 보면 착잡할 따름이다.

요즘 들어 읽는 심리학 책에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구절을 접했다. 미국 심리학자 에릭슨의 견해다:

성숙한 어른은 남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줄 알 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어린 사람들을 보살피고 키우고 싶어한다 ... 생성을 체험하지 못하면 자신의 존재가 쓸모없고 인간관계가 무의미하고 메마르다는 느낌이 생겨난다. 고인 물(정체)은 생명을 키우지 못하고 썩는다. 남들을 보살피고 가르치고 싶은 욕구에서 배려의 덕성이 생긴다. 남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는 우리가 남들에게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고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심 갖는(자기도취) 일도 피한다. - 홍숙기, 성격심리(上), pp. ( )

윗 글은 40대 전후 및 50대에 적용되는 이야기다. 완전히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이 이야기와 어느 정도 부합되는 중년기를 거쳐온 것 같다. 아래는 65세 이상의 노년에 관한 사항이다:

앞의 단계들을 잘 넘긴 사람은 노년에 들어와 지나온 삶을 긍정하고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사람은 인류가 좋은 쪽으로 발전해가고 있으며 자신이 이삶의 흐름에서 작은 기여나마 했다는 만족감을 느낀다. 물론 실패와 실수들에 대한 후회도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절망도 한다. 절망이 더 큰 사람은 자신을 증오하고 세상과 타인들을 원망하며 헛살았다고 한탄하는 반면, 통합이 절망보다 클 때 지혜의 덕성을 얻는다. 젊은이들이 무력감을 느낄 때 지혜로운 노인들을 보면 삶이 완성되고 결국에는 평화가 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 위의 책, pp. ( )

내 여생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꿈이 바로 윗글과 같은 경지의 노인으로 늙어가는 것이다. 나의 이 바램은 어쩌면 내가 이십대 때에 품었던 미래에 대한 꿈보다도 더 간절하다. 온전한 노화, 또는 성숙을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그리하여 과거의 과오들을 용서받고, 떳떳하게 나의 신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 열망은 절실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러나 평생 학문을 했다는 전 총리나, 또 불교와 예술에 심취했다는 전 청와대 수석이나, 이땅의 문화계를 주름잡는 유력지 기자나, 다들 한 때 나같은 열망을 갖지 않았을까? 아니, 그들은 적어도 먹고 사느라 생의 모든 에너지를 바쳐야 하는 장삼이사들에 비해 그같은 높은 열망을 가졌어야만 했던 엘리트들이 아닌가? 과연 나라고 해서 그들과는 달리, 집요한 육체와 물질의 유혹을 극복하고 온전한 성숙의 노화로 접어들 수가 있을 것인가? 젊은이들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는 지혜의 노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지난 주에 존경하는 노학자 분을 뵈어서 다행이다. 우리에게는 본받을 만 한 모델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많은 찬사를 받은 한 주일이었으나, 삶의 수렁에 빠진 많은 수의 중장년 층 남자들을 보며, 자기실현으로 향하는 수행의 길은 언제나 칼날 위를 걷는 위태로운 여정이라는 사실을 새삼 기억해낸다.

신께서 내게 밝은 통찰과 건강한 기운을 주시어, 사랑과 헌신은 극대화시키고, 탐욕과 이기심은 최소화시키는 성숙의 수행을 매일 매일 이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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