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불행의
이유 (2011/9/25)
©
Suk Hoon Han
일어나야
할 일만 일어나는 것이다. 모든 것엔 다 그럴 만 한 이유가 있다.
불교의
이같은 연기론적 진리를 부인할 수가 있을까? 세상에 '그냥' 일어난
일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어떤 물리적 현상도, 심리적 움직임도, 사회적
행위도 다 그 배경과 원천이 되는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고 어떤 사건이나 개체가 스스로 제1의 발생 원인이었다면
그것은 개념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한 '신'이겠다. 그러니 내게
일어난 모든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일들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일들이겠다.
최근에 일어난 좋은 일들에
관해 생각해본다. 살다보면 좋은 일들이 여러 가지 일어날 때도 있다.
마치 추수기에 결실을 거두듯, 여러 개의 상과, 상금 등등을 받는다.
덕분에 살림살이는 좀 피고, 사회적 자긍심도 다소 되살아나, 평소의
다소 지나치게 자책적인 자기성찰의 어두움을 의식 저 켠에다가 슬쩍
밀어둘 수 있다. 집 안팎의 고난과 건강 상의 장애로 인해 고생이 많았던
지난 여름에 비할 때, 뭐랄까, 기운이 되살아난다고 할 수 있다. 요즘의
좋은 일들은 왜 일어났을까? 아마도 첫째 연유는 신의 은총일 것이라고
추정해두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신께 짐짓 예의를 차리려는 꼼수일
수 있다. 허나 둘째 연유는, 내가 지난 고행의 기간에도 아둥바둥대며
내 일의 스탠다드를 훼손시키지 않으려 죽을 힘을 다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내 일에 대한 인정과 보상이 여러 건 뒤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쓰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자만이 너무
심하다. 내가 거둔 것들을 위해 알게 모르게 기여해준 이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고, 그들 덕분에 거둘 수 있었던 것이거늘.]
최근에 일어난 나쁜 일들에 관해
생각해본다. 지나치게 나쁜 일들도 살다보면 일어난다. 나로선 오랜
시간 헌신적으로 공을 들인 관계로부터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무시와
홀대를 당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겉으로 아무런 표도 내지 않고 여러 달을 보내지만,
'따귀 맞은 영혼'이라는 마음의 상처 치유서를 줄곳 읽고 있던 걸 보면
나의 내상(內傷)이 매우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일들을 당하면 인간에
대한 기본적 신뢰마저 얼어붙어버리는 듯 하다. 허나, 이런 나쁜 일들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원체 이기적이고
자신 밖에 모르는 사람과 만났기 때문에? 그럴 지도 모르지만,
세상 만사는 상호작용일진대, 적어도 이유의 절반은 나에게 있었을 것임을
당연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 "오랜 시간 헌신적으로 공을 들인"
것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무심하지 못했던 것이 잘못이다. 나는 왜 그런
무리를 범했을까? 원인은 내 안의 깊숙한 곳에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내 탓이다.
만사의 필연성을 직시함으로써
그 '만사'에 나를 얽어매고 있던 속박의 줄을 하나, 둘 풀어버릴 수
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따름이다. 그게 수행이다. 수행 속에
얻게 된 확고한 진리 하나는, 단 번에 이룰 수 있는 손 쉬운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단 번에 이룬 것처럼 보이는 일도 다 인연의 씨줄과
날줄 위에 그 소이연들이 촘촘히 박혀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내게 일어난 좋은 일에 대해선 깊이 감사하되, 나쁜 일들에 대해선 깊이
묵상할 따름이다. 일어나야만 할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니,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밖에 무슨 도리가 있을까. 수용은 소극적 수동성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으로
운명에 맞서는 태도인 것 같다.
멀쩡한 하늘에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그러다가 또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친다.
몸이 젖고 풍파에 시달림을 당연히 받아들여라. 왜 폭풍우가 와서 이런
고생을 하나 한탄하는 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다 그럴 만 해서 오는
것이니. 비구름이 물러간 뒤 반가운 햇살에 젖은 몸을 말리고 한숨
돌리며, 삶 속에 숨어있는 신의 참 뜻을 보아라. 그 자체로 "좋은
일"도, 또 "나쁜 일"도 없다. 좋은 일이 해악임이 드러날
수도 있고, 나쁜 일로 인해 더 좋은 게 주어질 수도 있다. 삶에서 일어나는
만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힘을 기르지 않고는 '인생
단 번에 해결해준다'는 로또같은 허언에 갈대처럼 흔들리다가, 죽도
밥도 안된 채 늙어버리고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