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너머의 신 (2011/4/30)
©
Suk Hoon Han
1.
신은
그 자신 너무나도 높으셔서 어떤 형태의 지식이나 욕망도 그에게 미치지는
못한다. 욕망은 깊고, 한없이 깊다. 그러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욕망이 바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신일 수는 없다. 이해와
욕망이 끝나는 지점, 거기에 어둠이 있고 거기에 신의 찬연함이 시작된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오강남 교수의 '인류의 스승' 중)
지고의 신, '신이 지고하다'는 진리를
삼십대 후반까지 세계 최고 지성들이 모여있다는 미국 명문대에서 '학문'을
하면서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신은 지고하므로 지식과 욕망으로써
가닿을 수 없다. 그렇다. 나는 사십 살 다돼서 이것을 알게 되었다.
헌데 에크하르트 싸부께서는, 신의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는 그놈의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깊고, 또 한없이 깊단다. 환장할 노릇이다. 내가
그렇게 떨치고자 발버둥치는 욕망이라는 것이 한없이 깊다니...
내가
이 몸뚱아리 달고 태어나 살고 있는 이 현세에서 지금껏 극복하고 초월한
욕망이 얼마나 있는가? 아침에는 계속 자고 싶은 수면욕을 겨우
떨치고 일어난다. 대학에서 강의하다보면 학생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고 존경받고 싶은 명예욕에 쉽사리 흔들린다. 배고프면 식욕이 엄습한다.
성욕은 가만히 있는가? 젊었을 때에 비해선 물론 훨씬 다루기 쉬워져,
신체 기관에 집약된 형태의 욕구는 통제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으되,
심리적 결핍에 연결된 부분은 여전히 내 통제력을 위협한다―원초적
생명 욕구의 집요한 매달림이런가. 뿐만 아니라 많은 강의를 마치고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목이 컬컬하여 당장 맥주부터 찾는다. 쾌락 욕구 또한 좀체로
길들여지지가 않는 것이다. 참으로 욕망은 깊고 또 한없이 깊은가 보다.
그런데
그 깊은 욕망 따위로는 신에게 이를 수가 없단다. 다행히 지성의 이해도,
심신의 욕망도 다 끝나는 지점이 있다는데, 바로 거기에 어둠이 있단다.
그렇겠다. 거기에 그 깊은 어둠이 있을 것이다. 나는 평생 그 어둠을
두려워해왔던 것 같다. 신을 전혀 몰랐을 때에도 나는 그 어둠을 예상하며
두려워했던 것 같다. 모르지만 예감되는 그 어떤 상태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차라리 인간적이다. 허나 알고나서도 두려워하는 것은 나약해다고
해야 할지, 한심하다 해야 할지... 나는 신 체험 이후에도 그 어둠을
예상하고, 그러며 두려워했다. 이것이 엔도 슈사쿠가 언질해준 신의
'침묵'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테레사 수녀가 고백했던 죽음보다 더
두려운 신의 무언(無言)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내가 그 어둠을 충분히
겪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어둠으로부터 "신의 찬연함이 시작된다"는
말씀을 알아들을 것도 같다.
2.
욕망도 지성도
다 '나'에 제한돼있다. 이기적이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어둠을 충분히
용감하게 극복해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깊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여 내 생각만 하고 살다보니 '나의' 욕망, '나의' 지성에 붙들려
있는가 보다. 타인들과의 주고 받음이라는 맥락 속에서 나를 다시 봐야
한다.
저 자신도 제대로 못하고 살면서도 공연히 남들 욕이나
한다.
최근에도 자신이 부유하고 학식이 많다하여 세상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중시하며 특권층 행세를 하는 엘리트들을 비난했다. 허나 내가 그들보다
나을 게 뭔가? 나는 돈과 지위가 없으니 다른 뭔가로 남들보다 나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가. 자신을 차별화하여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모든
욕망 기저에는 어리고 미숙하여 불쌍한 자아가 도사리고 앉아 있는 것이거늘.
스스로
남보다 나을 것도 없는 주제에 세상에 대해 푸념은 여전히 하는 바,
이를 부정적으로 보자면 제눈의 들보는 못 본 채 타인 눈의 티끌을 욕하는
꼴이겠으나, 긍정적으로 보자면 세상속 타인들과 연결됨에 관심을
갖는 것일 수 있겠다.
예컨대 이런 의구심이 든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의 자기보신 욕망에는 한계가 있을 것인가? 강의 나가는 '명문대'
몇 곳에서 청소부들 임금 때문에 오랫동안 시위가 있었다.수천억의 기금을
쌓아둔 대학 재단들은 조직의 최말단에서 고생하고 있는 그 가난한 이웃들에게
어찌 그리 몰인정할 수 있을까. 쌍용 자동차 해직 근로자들의 연쇄 자살
사태를 보며 이 사회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아 편히 먹고 사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현 정권은 실로 반항자들에게 '본때'를 보이려는가 보다.
그냥 죽으라는 것 같다. 이게 어디 현 정권에만 국한된 일인가. 고용 구조의
밑바닥에 있는 보험 세일즈 직원들, 택배 기사들, 대리운전 기사들은 생활도
보장 안되는 쥐꼬리 만 한 노임을 받으며 하루 종일 죽어라고 노비처럼 일하고
있다. 수많은 실업 청년들은 700원 짜리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연명하고 있다. 노량진 고시촌의 예배당에서는 고시생 청년들에게 밥퍼
봉사를 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과연 1인당 소득 2만불을 넘는 '선진국'에
진입했단 말인가.
이런 현실들을 외면한 채 나 홀로 독야청청
도 닦아 잘 살아보겠다는 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지만,
나같은 인간은 평생 수신만 하다가 그것도 제대로 못한 채 저승 갈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수신과 제국과 평천하를 시간적 순서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까?
3.
자아존중감이 낮아질 때에는
본받을 만 한 모델이 필요하다. 최근에 한 멋진 미국 정치가의 말을
들었다. 내가 전혀 좋아하지 않는 미합중국 공화당의 원로 정치인이자
와이오밍 주의 주지사였던 앨런 심슨이란 분이 부도덕한 정치가들에
대해 이렇게 일갈했다:
"당신은 윤리적 가치관에 대해 연설을
한다면서 뒷편에선 여비서와 놀아나고 있다는 말인가? 이보쇼, 그만
집어치우지 그래." 심슨은 이런 말도 했다: "나는 동성애자에
대한 공포증이 있는 자, 반 여성적 태도를 가진 자들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뜻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왔다면, 혼탁한 세상에 대해 이렇게 명쾌하게 호통을
칠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좌파도 아닌 내가 반 정권적 시각을 보이는
데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학생들도 있다. 이젠 덜 신중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확고하게 내 뜻을 학생들에게 말할 필요도 있겠다, 영 못 알아듣는
것들 같으니. 좌파냐 우파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회에서 인간의 도덕성이
실제로 중시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4.
"테레사 수녀는 선교회의
목적이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 집 없는 사람, 불구된 사람, 눈먼
사람, 나환자, 사회에서 남이 자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 사회에 짐이
된 사람들, 모두가 상대해 주지 않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라고 했다."
- 앞의
문서
불우한 저들이 다 나라는 것이 신의 가르침이다. 공부한다고
제 안에만 파묻혀있던 나는, 실은 '나'인 저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나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왔던 것이다. 이는, 비록 내가 공부는
한다지만, 실상은 무지하기 때문인 것 같다. 타인을 내몸처럼 돌보는
긍휼심이 사실 '착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그들과
나의 분리를 넘어선 '앎'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물론,
'머리'로 도달하는 앎은 아니겠다.
인생의 경험에 비추어 반추해보면, 몸으로
경험해본 것에 대해 인간은 절실하게 공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난과
핍박을 직접 겪거나 그 주변에서 가까이 관찰을 한 이들은 그 고통을
잘 이해하고 그에 대해 사회가 해줄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가난과 핍박을 체험한 일도, 목격한 일도 없는 이들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기 마련이다. 그래서 서울시 최고 부촌이 밀집돼있는 지역의 자선기부금
액수가 빈곤한 타 지역에도 못미치는 것일지 모른다. 이를 너무도 절감한
헨리 나우웬 같은 영성가는 풍요로운 미국 동부의 아이비 리그를 떠나 남미의 빈민촌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가 보다. 부촌에서 평생 살고 있다보면 가난한 이들의
삶의 아픔을 도저히 알 수가 없을 게다.
나는 부유한 이들이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단지 무지할 뿐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무지한데도 스스로는 유식하다고
오해하고 있다 보니 계속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게 되고, 그러다 보니
지식과 도덕성은 도저히 분리될 수 없다는 앎의 경지에는 통 다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식과 앎이, 유식함이
'우리 모두' 함께 하는 삶의 가치를 외면할 때, 그건 단순히 피상적
인격의 싸구려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부유층의 그들보다 잘나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건 결코 아니다. 단지 경제적으로 그닥 유능하지 못하다보니 오랜 세월 점심
한끼도 대학 구내식당과 같이 싼 곳으로만 찾아다니고, 아무리 피곤해도
택시를 타지 못하는 습성이 몸에 밴 탓에 '없는 이들'의 관점에서 말하기가
좀 쉬울 뿐이어서 그렇다. 내 뱃살에 기름기가 끼는 날, 나도 그들처럼
사회적 불감증에 걸릴지 모른다.
5.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도 떨쳐버리지 못한 주제에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비심에 대해, 또는 그러한 자비심 없음에 대해 떠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없이 깊은 욕망을 다 꿰뚫을
경지에 오르기를 기다리며 혼자 공부만 하다가 어느날 그냥 죽어버린다면,
그 또한 한심한 노릇 아니겠나. 또는 그보다도, 불완전한 수행자가 사회
정의를 논한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수도 있으나, 정의를 논하고 타인들에게
다가갈 때에 역설적으로 나의 불완전한 수행이 향상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가 하나임을 실천을 통해 느끼고 알게 됨으로써 나 또한 구원받는
것 아니겠는가. 가장 고귀한 나로 있음은 가장 고귀한 행함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시간적인 선과 후의 개념으로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알면 행하고, 행하면 알 것이다. 내가 그들을 구하고, 그들이
나를 구할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임을 알게 되지 않을까. 욕망을
너머 신에게로 가게 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