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적
인식을 위한 여유 (2011/4/17)
©
Suk Hoon Han
봄
기운이 도는 토요일 오전,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지나치다가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는 화단에 쪼그려 앉은 채 풀잎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내 아이를 봤다. 노오란 봄볕과 작은 아이, 겨울 내 얼었다 풀린
땅의 흙내음, 연약한 새싹들, 이러한 감각들이 한데 어우러져 수십 년
전의 내 모습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내가 저 아이만할 적에 바로
저런 모습으로 봄의 새싹을 만지고 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 기분도 함께 되살아났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신이 나 있지도, 기분이 쳐져 있지도 않았다. 혼자라는 것이 조금은
쓸쓸했던 것 같고, 그리고 햇볕이 지루하게 느껴졌었다. 지루하게 긴
시간의 흐름 위에 봄볕도 단조롭게 쏟아져내리던 그때, 나는 그저 심심함만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릴 적에 좋아했던 모든 종류의 놀이를
질릴만큼 한 뒤에 느껴지던 막막함. 이제 또 뭘 해야 하지? 조금은 따분하지만,
모든 것이 미정(未定)인 그 상태 그대로의 막막함이 좋았다. 나는 그렇게
아무 것도 안하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었다. 공원의 그 아이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공부 따위를 강요하지 않던 부모님 덕에
나는 그렇게 아무 것도 안하며 멍청하게 지루함을 향유할 수 있었다,
초등 때도, 중학생 때도. 그러한 별로 위대하지 않은 무위(無爲)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의 다양한 측면을 건드려볼 수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나는 수줍었으나 때로 도발적이었다.
까불고 쾌활했으나 이따금씩 침묵하고 심각했었다. 천진난만했으나 음탕한
상상을 펼쳐봤었다. 정감있고 순했으나 어떤 때엔 냉정하고 공격적이었다.
아동기와 사춘기의 아이가 수용하기에는 버거운 자신의 양면성을 다소 빨리
자각했었던 것 같다. 나의 양면성, 모순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십대 때 공자나
예수같은 위대한 스승들의 글을 읽다보면 나 자신이 천사인지 악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 내면의 명백한 모순을 수용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소년은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황을 좀 끝내고 편히 살기를
원했기에 모순의 이유를 알아내고 싶어 했던 것 같고,
어쩌면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수십 년이
흘렀다. 내 안의 선과 악, 미와 추, 빛과 어둠 중에서 어느 것도 제거하거나 버릴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결국은 양쪽 극단을 모두 품고 갈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악이 있기에 선을 알고 배울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선과 악은 항상 공존할 수밖에 없다. 같은 이치로, 실패와 좌절이
있어 성공과 보람도 있는 것이다. 나태와 게으름이 있어 치열함과 성실함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 이치를 무시한 채 오직 성공과 근면·성실만을
추구했다가는 자연을 거스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카이스트대학처럼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오로지 성공만을 향해 채찍질 당하는 엘리트들을
양산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엘리트 될 이들은 필부필부보다도 더더욱
자신 안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따져볼 시간적 여유와 기회를 가져봐야
하는 건 아닐까? 세계 최고라는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들도 학생들에게
너무 '쎄게' 공부만 시키다보니, 젊은이들의 내적 성숙과 도덕성을
키우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全人' whole person의
가치는 비현실적인 구호로만 취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일 게다.
또한,
실패 없는 성공이 있을 수 있는가? 미국의 IT업계가
실패와 시행착오를 보듬지 않고 지금처럼 세계를 주무르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상상력과 창의를 북돋워주는 개방적 평가가 허용되지 않는
성적 체계 속에서는 젊은 학생들이 과감한 새로운 시도를 해봄으로써
기존의 인식의 지평을 확산시켜가는 발랄한 공부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가뜩이나 작금의 우리의 문명은 새로운 발상과 상상과 대안이 절실하거늘.
앞만 보고 달려가는 맹목적인 근면함이 과학도들에게 자신의
연구의 의미에 대해 성찰해볼 기회를 줄 수 있을까? 그런 식으로 성공과
실적만을 향해 달려가다 원자력 발전소 같은 과학 이기의 오만가지 가능성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고, 그래서 모두가 방사성에 오염돼 멸망하게
되면 어쩔 것인가?
우리 내면의 다양한 양극단 사이에서 변증법적
통합을 이루지 않고 어느 한 쪽으로만 밀고 나아가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일런지 종종 발걸음을 멈추고 자문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자문과
성찰이 동반하는 더디고 느린 무위는 과연 비실용이고, 맹목적
성공 추구가 초래하는 빠르고도 파괴적인 유위(有爲)가 '실용'이란 말인가? 설령 그런
실용이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한다 해도?
사실 나 자신도
과다한 의무와 책임 아래에서 버둥거리고 사느라 느릿느릿 여유를
구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긴 해도, 나는 매일, 매일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련다. 내가 원래 어디를 가려고 했었던지, 그곳엔 왜 가려고
했었던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