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받을이

본받을 만 한 이 (2011/1/17)

수업시간에 썼던 자료의 글 중에서 한 현직 교사가 이렇게 주장했다: '선생은 자신의 삶으로써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돼줘야 한다.' 맞는 말이다.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의 기준에 따르자면 나는 선생이 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학생들에게 물었다, 장차 선생이 되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선생에 대한 이런 요구 사항이 너무 부담스럽지는 않은가요? 나는 이런 선생이 될 자신이 없습니다. 예전에 젊었을 땐 내가 그런 선생일 수 있다는 오만함을 품었던 때도 있으나, 그러나 늙고 타락해버린 지금은 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워서 감히 젊은 학생들에게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건 솔직한 말이다. 딴데 가서 하는 내 행동거지에 대해서는 잘 한다고 큰소리 칠 자신이 전혀 없지만, 그래도 내 학생들 앞에서만은 나는 진실해지고자 최선을 다한다. 나는 젊은이들이 본받겠다는 마음을 품을 만 한 훌륭한 인물이, 선생이 될 자신이 없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나의 한계들을 더욱 명확하게 직시할 수 있게 되고, 나의 약점들을 손쉽게 분류 및 나열할 수 있으며, 나의 이기심과 악함의 재고상태를 상시 꿰고 있게 된다. 자신의 이같은 부정적인 측면들을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가 어떻게 자신의 얼마 안되는 알량한 장점을 자랑스럽다고 내세울 수가 있겠는가. 허나 나의 이같은 솔직하지만 패기없는 태도에도 역설의 논리가 내재돼있기는 하다. 자신의 무능과 부족함과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부단히 해야만 하는 운명을 안고 태어났으며, 선생들도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이들일 따름이라는. (좀더 나아가 보자면, 선생이라는 이들은 그런 노력을 보다 더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는 데까지 주문해보련다.)

또 한 해가 흘러 오십대는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세상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스승 같은 것이 감히 되고자 하는 허욕을 버린지는 한참 됐다. 아마도 이 세상에는 극소수의 그런 스승들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 극소수에 속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나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능하고, 부덕한지를 예리하게 의식하며, 그것들을 견디고 그것들을 극복하려는 힘을 내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혹시 나의 이런 말들이 냉소적 위악이거나, 짐짓 겸손을 떨려는 수작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들이 있건 말건, 나로선 신경 쓸 필요는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나를 찾는 순진하고 건강한 젊은이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조금 부연 설명을 해보겠다. 나의 외적 인격, 즉 對사회적 자아랄까, 페르조나의 차원에서는 내가 딱히 본받을 만 한 게 없는 자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외적으로 특별히 뭘 잘못하며 사는 건 없으니까. 나는 차도의 교통량에 따라 횡단보도의 신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이따금씩 차를 과속으로 모는 것 외에는 그다지 법을 어기는 일도 없고, 윤리적으로 지탄받을 짓을 하지도 않는다. 병역도 필했고, 세금도 꼬박꼬박 다 내며, 대체로 사람들에게 친절과 호의로써 대하려 한다고 스스로는 믿는다. 술을 좋아하지만 음주도 과하지 않고, 주량에 따라 자세가 흐뜨러지는 일도 없으며, 이른바 '퇴폐 업소' 출입하는 일도 없고 가정에 충실하다. 내 주변 사람들의 말대로 나는 꽤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다. 따라서 딱히 뭘 잘해서 존경받을 만 한 건덕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비난받을 만 한 소지도 없다―인격의 외적 차원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말이다.

그러나 페르조나와 나의 내적 인격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또는 나의 참된 자기를 둘러싼 무의식의 억압과 건강도에 대해서는―이것들이 기본적으로 사회적 잣대인 '존경할 만 한'이라든가 '본받을 만 한'이라는 표현이 적용될 범주는 아니지만― 그저 오늘도 어제처럼 꿋꿋하게 견디고 극복해나가고 있다고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겠다. 의식의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나는 이같은 복잡한 과정은 모른 척 한 채, 저 수면 위에 떠있는 페르조나만 말갛고 평온하다고 해서, 그같은 외적 인격이 '본받을 만 한'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스스로를 위선자로 여기지는 않으나, 내 안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의식하고 산다. 양자가 다른가? 다르다. 위선은 자신의 '위선'이라는 증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해 부끄러움이나 반성, 죄책감, 부조화감 등을 의식하지 않고 그 증상의 부산물인 일시적 이득에 지속적으로 매달리는 것이고, 지킬과 하이드는 위선이라는 증상의 부조화 때문에 괴로워 하는 것이므로. 작년에 채점 시비로 인해 한 학생과 전화의 문자 메시지로 여러 차례 공박을 주고받다가 서로 감정이 격해진 일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두 대학에 동명이인인 학생 두 명이 거의 하루 간격으로 내게 성적에 대한 불평을 각각 제기했고, 나는 그 두 학생을 한 사람으로 오해한 나머지, 한 번 해결된 문제에 대해 자꾸만 되풀이 해서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한다고 생각하여 매우 엄격하고 냉냉하게 대꾸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같은 나의 엄격함에 대해 그 학생은 '지킬과 하이드 같다'는 평을 해줬다. 수업 때에는 정말로 자애로운 선생인 줄 알았는데, 문자 메시지로는 완전 딴판이었다는 말이다. 그말을 듣고 새삼 내 안의 지킬과 하이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결론은, '그래, 어차피 인생은 둘다 항상 데리고 가는 거다'였다. 나는 위선자가 되기는 싫지만, 지킬과 하이드의 모순은 싫어도 안고 갈 수밖에 없다.

내가 구독하는 타임 지가 시도 때도 없이 찬양하는 헐리우드 배우가 조지 클루니인데, 오십대로 인생의 선배이신 클루니 아저씨께서 또 한 번 큰 건을 해내셨다. 내전 위기에 휩싸인 아프리카의 수단에 또 한 차례의 대학살 조짐이 증폭되고 있는데, 이를 막기 위해 클루니와 그 동조자들이 인공위성으로 실시간 촬영한 영상을 중계하는 웹페이지를 통해 수단 군부의 활동을 세계적 차원에서 감시하는 사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클루니 측은 나찌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모른 척 했던 동시대인들의 죄책감에 빗대어, 21세기의 국제사회가 이같은 대학살을 목격하면서도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사업의 훌륭함에 대한 언급은 접더라도, 나는 클루니가 삶에서 체득한 단순한 지혜가 이같은 국제적 인류 구제 사업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사실에 감동하게 된다. 그는 세계적인 인기 배우로서 어디에 가든지 보도진의 시야를 벗어날 수가 없고, 그러다 보니 그같은 세상의 시선에 맞춰서 행동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토로했다. 마찬가지로 수단의 군벌들도 국제사회의 시선에 노출된 것을 의식한다면 그에 맞춰 행동할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클루니의 지명도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허무할 뿐인 무명의 한 개인에 불과하지만, 나 자신도 그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봤기에 그의 지혜에 공감하는 바 있다. 예컨대 나는 신촌 로타리를 둘러 싼 3개 대학에 출강한지가 여러 해가 지났고, 그곳을 지나다니다 보면 자주 학생들의 인사를 받게 된다. 나를 거쳐간 학생들 중에 졸업하고 떠난 이들도 많겠으나, 어쨌든 총 연인원 수천 명은 되는 학생들을 그 지역에서 가르쳤기에, 추측컨대 나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거나, 또는 모른 척하는 학생들까지 감안한다면, 나는 그 바닥에서는 꽤 많은 젊은이들이 알아보는 인물이 돼버렸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은 어떠한가? 예컨대 그 부근에서 벗들과 술자리를 갖고 나서는 나 혼자 점잔을 떨게 된다. 죽마고우들의 경우에는 한잔 걸치고 나서―아니, 실은 일상적으로― '소새끼, 개새끼' 류의 막말을 통상적으로 교환하게 되지만, 그 동네에서만은 나는 홀로 점잖게 대꾸한다―혼자 당하는 게 분하긴 해도. 젊을 때의 나와는 달리, 신촌 외의 대학가에서도 대체로 나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다니게 됐다. 특히 찻집이나 음식점에서 여제자들을 상담해줄 때에는 주변의 시선이 집중됨을 목격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이십 년은 나이 차가 나보이는 남녀가 담소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생소한 것일런지. 도덕적으로 책 잡힐 소지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줏대없는 나는 괜스레 평소보다 점잖은 어투로 말하게 되곤 한다―본디 좀 푼수처럼 무게없이 떠드는 편이거늘. 실로 타인의 시선이란 평범한 인간들이 벗어날 수 없는 강한 위력을 행사하는 허상인가 보다.

해서, 남들 눈을 의식하다보니 나는 본의 아니게 실물보다 훨씬 점잔을 빼는 인간으로 처신하게 됐다. 원래는 중년 이후에 내면의 여성성을 긍정적으로 발달시켜서 여성들과 가볍게 수다 떠는 데 능한 이가 됐건만, 여제자들 앞에서는 점잔을 떤다. 이건 위선이 아니라 사회화된 자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사회 속에서 선생은 선생답게 행동할 것을 요구받으므로. 나는 그처럼 사회화된 정형을 깨부수고 뛰어넘는 경지는 경허선사 정도나 되면 모를까 나같은 일반인들은 섣불리 흉내내서는 안된다고 본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미화된 나의 페르조나, 비록 경박한 나보다 훨씬 멋지게 포장됐다는 것이 다소 위선적이긴 하지만, 그같은 포장 작용이 그 내면의 알맹이인 '나'에게 제공하게 되는 긍정적 고양 효과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클루니가 본받을 만 한 인물이라고 여긴다. 그는 멋진 외양에 자신의 내면을 맞춰서 살아오느라, 실제로 내외가 멋지게 고양된 사례인 것 같다.

결국 누군가가 본받을 만 한 이인가의 여부는 그의 페르조나의 멋짐 뿐만이 아니라 그의 내면의 진실성이 얼마나 깊이 페르조나에 자국을 남겨놨는가에 달려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클루니가 겉으로만 멋진 인간이라면 그저 한 명의 인기 배우로서 세상을 스치고 가겠으나, 그의 내면의 의지와 신념이 그의 외적인 행동으로 뻗어나왔기에 세인이 본받을 만 한 경지에 올랐다 할 수 있겠다. 고로 선생의 경우에는 외적인 삶의 모습이 깨끗한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육자적 열정이 내적, 외적으로 연결돼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본받을 만 하다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전자도 어렵지만, 후자는 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내가 본받을 만 한 선생이 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헌데 내가 그런 선생이 되지 못한다 하여 '선생은 본받을 만 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부정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못한 처사겠지? 자신이 못한다고 다른 이들도 못할 것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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