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단상 (2011/2/27)
©
Suk Hoon Han
1.
좋아하는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한 권을 영문본으로 읽기 시작했다. 읽다보니
예상 밖으로 흥미진진해서 두꺼운 그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어디든
들고 다니며 읽고 있다. 이즈음 진행중인 나만의 프로젝트도 있고 신학기
강의 준비도 있고 하여, 책상머리에 앉아서 얌전히 소설책 읽고 있을
여유는 못내겠고, 별 수 없이 이동 중이거나 잠간씩 짬이 날 때에나
읽게 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예전에 외국어로 된 책을 밖에서 들고
다니며 읽는 것을 꺼려했던 기억이 난다. 괜히 가방 끈 긴 티를
내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 싫어서랄까. 그러니까 아무 상관없는 남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까에 관해 신경을 썼다는 얘기다―사실
당연한 일이지만. 헌데 지금은 그런 신경을 덜 쓰는 편이다. 언제부터인가
제3자들의 시선의 무게와 가치를 경시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남들 신경이나 쓰며 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냥 자연스러운 '나' 자신 그대로, 있는 그대로 살자는 생각이
들었을 게다. 허나 전철 안에서 소설이 재미있어 혼자 키득대며
읽다가 문득 정수리가 간질거려 고개를 쳐들어보면, 나를 바라보는 시선
몇몇이 포착되곤 한다. 그 시선들에 대한 내 마음속의 미세한
반응을 분석해보면, 나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며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는 아마도 대체로 허구이겠다.
허나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나의 제약은 나의 힘만으로도
고칠 수 있는 사안 아닐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외부의 영향력 때문에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국내
최고 재벌기업의 임원인 한 친구는, 자신의 회사의 외국인 직원 중 북한
사회를 경험해본 한 직원이 이렇게 평했다는 말을 들려줬다:
'한국기업이 북한보다도 더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 나라 조직 사회의
문화는 나 같은 놈을 질식시킬 것이다. 돈은 많이 못 벌지만, 조직
밖에서 자유롭게 내 멋대로 일하며 사는 나의 이 삶을 도저히 포기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소속된 곳 없는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따위의
유치한 사안에 대해서나 고민하면 된다.
2.
며칠 전, 아버지를 모시고 가까운 사촌들과 그들의 자녀들과 식사를
했다. 세상 살이에 대한 어른들의 얘기가 지루해서 몸을 비비꼬고
있는 중학생 계집애한테 말을 걸었다. 내 큰딸과 동갑내기인 그 아이,
줄곳 손에 쥔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그 아이는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운이 나서 힘차게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생떽쥐베리가 '어린 왕자'에서 조언했듯이, 아이들이나 젊은이들과
대화할 때에는 늙은이 생각을 버리면 된다. 그러니까 '공부 잘해라',
'엄마 말 잘 들어야지' 따위의 말 말고, 네가 좋아하는 게 뭐야(나비
채집을 좋아하니)? 좋아하는 노래는? 텔레비전 프로는? 등등의 질문을
던져줘야 한다. 이런 단순한 사실을 어른들은 통 모른다. 지천명에 다다르고
있지만 나는 어린애들의 마음을 잘 기억하고 있다―그래서 마음이 유치하다.
암튼, CSI 라스베가스의 호레이쇼서부터 잔소리만 하는 엄마에게 효과적으로
저항하는 방법 등등에 관해 그애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아이는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웠다는 말도 했고, 그래서 나와 간단한 일어로
대화도 나눴다. 어른들 틈에서 파김치처럼 늘어져 있다가 대화를 나누면서
금세 기운이 동해 눈동자가 반짝이며 장래 희망까지 털어놓는 그 아이를
보며 내 기분도 즐거워졌다. 조금만 예민하고 섬세하게 다가가서
들춰보면 반드시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아이들의 밝은 눈동자,
그 눈동자를 들여다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눈동자 안에서 반짝이고 있는 자유에 대한 에너지를 느낀다.
그 에너지에 불을 지펴주면 참으로 힘차고 건강한 한 사람으로 성장해갈
수 있을 텐데, 누구든지... 뭐, 이런 생각을 한다. 물론 내 자식들도
그런 생각으로 키우고 있다. 나를 찾아오는 젊은 제자들도 그 에너지를
스스로 찾도록 도우려 한다. 눈동자의 그 빛을 드러낼 수 없는 이는...
후우―, 굉장히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 힘들면서 별 성과도 없는,
어두운 삶을. 내가 젊어서 그랬었기에 그런 한심한 삶에 대해 잘 안다.
우리의 어린애들, 젊은이들이 그런 한심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러나 요즘의 어른들은 오히려 과거보다 더 젊은이들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 같다. '경쟁 사회' 속에서 눈동자 속의 빛이 이상주의나 낭만주의로
오인되고 있다.
3.
친한 선배 두 사람이 있는데,
그중 연장자인 선배가 암에 걸렸고, 의사로부터 몇 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평생 단짝이었던 또 다른 선배는 실의에 빠졌다.
나는 그 선배에게 술을 따라주며 상실의 아픔을 나눴다. 단짝을 잃는
그의 슬픔을 어루만져주려 했다. 나는 단짝 친구와 사귀는 타입이 아니지만,
녹록지 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이 여러 명 있다. 하여, 늙고 병드는
주변의 친구들 이야기는 내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스러져
가는 몸으로 여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중장년층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실의에 빠진 선배는 술기운이 오르면서 서서히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직장도 은퇴했고, 오십대 후반에
접어들고 있는 그 선배는, 지자체의 문화회관 등에 가서 인문학에 관한
강의를 듣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다고 했다. 선배는 경영학과를 나와서
기업계와 상업 관련 일을 평생해왔기에 나같은 아카데믹은 아니다. 그런
그의 노년의 즐거움에 관해 듣는 것이 나를 즐겁게 했다. 나는 매우 건강한
취미생활을 찾았다며 선배를 마구 칭찬해줬다―물론 단짝을 잃게
된 슬픔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려는 의도도 있었고. 헌데 그러고 보니
그 선배도 이십대 때에 학문 제분야에 대한 학구열 같은 게 있었던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아, 그 긴 세월 동안 관심 있었던 분야를
홀대할 수밖에 없었구나, 일하고 가족 먹여살려야 했기에. 주변의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을 시작하게 되는 오십대들, 그들은 위안도 필요하고,
살아갈 에너지도 필요하다. 그들의 눈동자에서도 희망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작업을 하려 하고 있다.
나는 대개 남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린애의 말을 듣고, 이십대 젊은이의 말도 듣고,
중년 아저씨의 말도 듣는다. 그들의 말을 세심하게 듣고 있다보면, 특히
애정을 갖고 깊이 듣고 있다보면, 그들은 숨겨왔던 가장 깊은 삶의 모색에
관한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 그 이야기들은 삶의 자유에 대한 꿈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꿈은 아직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꿈이다. 그
꿈을 되살려낼 수 있다면 그들의 삶에 건강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그들의 변화를 촉발시킬 자극을
제공해줄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어떠해야 할까? 이런 것들이 요즘 나의
'프로젝트'이다.
4.
식구들과 주말 저녁에
다운받은 영화 한 편을 봤다. 주인공은 죠니 뎁인데, 내 딸들은 그 유명한
배우와 제 애비 사이에 두 가지 공통 사항이 있다는 점을 예전에 용케도 알아낸
적이 있다. 그건 나이와 신장이다. 나는 노년으로 향해 가는 이들을
위한 책 같은 것이나 써보려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동갑내기인 헐리우드
배우는 아직도 미인 여배우와 로맨스 영화를 찍고 있다니―미국놈
치고는 키도 안 큰 주제에... 물론 세상은 워낙에 불공평한 곳이겠고,
그것에 대해 나의 신께 불평할 생각 따위는 없다. 암튼 딸내미들은
영화 보는 짬짬이 뎁과 애비를 비교하는 불손한 언사를 늘어놓았다:
뎁이 애비보다 훨씬 젊어보인다는 둥, 뎁은 여전히 멋있다는 둥―"아빠와는
달리"―, 모두 애비 속을 긁어보려는 의도의 평이다.
나는
뎁의 시나리오 선정 안목은 그다지 높이 사지 않지만, 그에게는 연령과
키 이외에도 나와 비슷한 점, 특히
흥미로운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었다―내향적
수줍음과 외향적 장난끼의 공존이랄까―그는
아마도 절대로 공무원 생활 같은 것은 못했을 것 같고, 중년 아저씨,
아줌마들과 함께 관광버스 단체 행락도 못 갔을 것 같다.
어쨌든 뎁은 자신 안의 어떤 면을 극대화시켜서 세계적인 스타가 됐을
것이다. 내가 세계적인 스타가 못된 것은, 아니, 스타는커녕 현실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삶을 살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뎁처럼
일찍이 자신의 자유의 빛을 찾아내지 못하고 인생을 빙빙 돌며 살아왔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 '인생 뭐 있어?'란 다소 자조적이고
체념적인 말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데, 그렇다, 인생 뭐 있겠는가,
이왕이면 뭐든 잘하고, 그래서 이뤄보고, 하고 싶은 것들 신나게 다
하며, 풍부하게 겪어보고 가야 하는 것 아니겠나―뭐, 그런 와중에
해탈이나 득도도 하면 더 좋고. 그러려면 자신 안에 (신께서 심어주시어)
반짝이고 있는 그 빛을 찾아내고 드러내야만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나는 늦게라도 그 빛을 찾는 법에 대해 알아내려 노력하는 한 인간이고,
오히려 늦었기에 그 빛의 형성 및 발화 작용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더 소상히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뎁처럼 세속적으로 '성공'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안의 그 빛을 제대로 한 번 밝혀보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또 내일도 내가 세운 프로젝트를 밀어붙여 볼 것이다.
5.
나의
프로젝트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을 추진하면서 나는
속박과 자유, 양면을 다 지향한다. 세상의 시선에 속박되는 것, 그래서
겉보기에 '뽀대나는' 뭔가를 세상에 제시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래서 남이야 뭐라든 제 생긴 꼴 그대로를 세상에
당당하게 선포하는 것 등이 그 양면이다. 세상의 숱한 진리들 중에 양면적이지
않은 것이 몇이나 있겠는가. 나는 나르시시스트적인 나와 '나'를
내다버리고 신에게 다가가는 나가 항상 공존하고 있다고 느낀다. 역설과
모순과 양면이 나를, 아니 인간을 잘 그려준다고 믿게 된 나에게 순수하고, 절대적이고,
고정불변이며, 유일한 이론이나 설명은 병적으로 뒤틀린 것으로, 요새
말로 변태적인 것으로 느껴진다―물론, 많은 이들이 정반대로, 복잡한
양면성은 변태적이고 순수한 절대성 추구가 선(善)이라고 오인하고
있다고 보지만. 양면성 대 단일성의 이같은 대조가 죠니 뎁의 연기에
잘 등장한다. 뎁은 대개 내면에 복잡성과 양면성이 가득한 역을 잘 표현하는데,
그런 인물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일은 없다. 그런데 뎁의
안타고니스트들은 양면적이라기보다는 순수하고 일원론적인 폭력성을
안고 있는 자들이고, 그들은 사람을 잡는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뎁의
배역과 동일시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의 내면의 양면성에 대한
변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