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영원 (2011/1/24)
©
Suk Hoon Han
1.
몇해
전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내가 죽으면 장기와 각막 등 신체를
기증하기로 어떤 기관과 서약한 적이 있다. 그러고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그 기관에서 서신 연락이 왔다. 그 서신을 아내가
뜯어봤다. 내용을 본 아내는 놀라서 내게 항의했다. 장기 기증 같은 일을
자신과 상의 한 번 없이 '저질러'버릴 수 있냐고.
내가 너무
냉정한 인간일까, 그것이 굳이 삶의 동반자인 아내와 의논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실은 장기 기증 후 장례에 모종의 지원을
해준다는 내용이 있기에 내 유족에게 득이 되리라 여겼던 것이었는데). 영혼이 빠져나간 나의 시신은 더 이상 부여잡고
있을 의미가 없는 껍데기가 아닐까. 사망 직후의 사체에 대한 여러 종교의
다양한 의미 부여 및 해석이 있음을 알고 있으나, 글세... 나는 그런
'전통'적 해석보다는 요즘 과학의 판정을 더 신뢰하는 편이라서―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죽으면 현세는 끝이다. 종결된 삶 뒤에 무언가를 남기려는 시도 자체가
허욕이다, 그게 이름이 됐건, 메시지가 됐건, 위업이 됐건 간에. 우리는
다 먼지로 돌아갈 따름 아닌가. 그렇다고 내가 니힐리스트인 것은 아니다.
살아 숨쉬는 동안은 내 전 존재로서 할 말을 다하고 가야 한다고 믿으니까. 또, 죽음을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라고 여기니까. 게다가 나는 내가 죽은
뒤에 사람들 가슴에 남아 있고픈 통속적 욕망도 한 줄기 품고 있다.
내가 죽은 뒤에 빈소에서 내 제자들이 슬피 울어준다면, 죽은 내 영혼은
하늘로 날아 올라가며―혹은
지옥으로 떨어지며―
행복해 할 것인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바램. 육신을 버린
영혼에게 무슨 현세에 대한 미련 따위 남아 있겠는가.
2.
"호킹은
대상들이 단일하고 확정된 역사를 가지지 않았다는 양자 이론을 우주
전체에 적용하여 인과관계의 개념을 흔든다. 과거가 확정된 형태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우리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거를 관찰함으로써
역사를 창조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서울신문,
2010.10.16)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과거를 되새김질한다. 재해석한다. 그때 우리의 과거는
되살아난다. 과거가 변화한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역사란 것이 기본적으로
인간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이야기들이니 만큼.
3.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무엇일까? 남이 만든 곡들을 편곡하여 피아노로
치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최근 한 반 년 동안은 그것을 전혀 하지 못했다.
거의 언제나 집중하고 있어야 했고 내 정신을 통제해야 했기에,
소리의 움직임에 따라 감정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탓이다. 그럼
이처럼 불안정한 음악적 작업 말고
안정되게 내가 지속하면서도 좋아하는 일은 뭘까? 그런 게 하나 있다. 학생들 가르칠
수업 시나리오 만드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건 매우 좋아한다. 내가 일주일에 30시간 씩
강의를 하면서도 모든 수업에 즐겁게 임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는
내가 그 수업 하나 하나를 다 즐겁게 준비하기 때문이다. 나는 강의만 하고
살래도 충분히 즐겁게 최선을 다해 일하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수업 준비에
일말이라도 재미있어 하지 않았던 기억이 없다. 상대가 수십 명의 학생이 됐든, 단 한 명이 됐든, 가르칠
준비를 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일이다,
4.
가장
좋아하는 일이자 잘 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자기실현의 정도 위를
걷고 있는 셈이다. 자기실현을 의식하며 걷는 도상에서 고개를 뒤로
돌려 지금껏 살아온 과거의 도정을 되살펴 보면 과거의 조각들 하나,
하나가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기여한 독특한 작용을 식별해낼
수 있게 되고, 따라서 나의 과거는 재창조된다―이전에는 아무 의미없는,
또는 나의 성장에 해악을 끼친 사건으로 여겼던 것이 알고 보니 지금의
자기실현 과정을 위해 꼭 필요한 한 부분이었음을 깨닫게 되므로. 먼 과거서부터 지금가지
뻗어온 길의 의미를 읽을 수 있게 되면, 지금의 그 길이 앞으로 뻗어가게
될 방향을 내다볼 수 있게 된다. 그 길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은
육신을 버리는 절차다. 우주가 마련한 그같은 절차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각 문화의 인간적 예식을 존중하지만, 나는 그 예식들이 문화적
한계 속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죽으면 내 영혼은 그냥 날아가버릴 것이다,
현세의 모든 한계와 제약 저 너머로. 영혼의 고향으로 귀향하는 것이다.
지금 소중한 내 학생들을 위해 수업 준비를 하는 것도 영혼의 고향으로
가는 영원한 여정의 매우 소중한 한 순간이다. 허무한 육신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이 순간은 무의미하지 않다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