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면성 (2011/8/17)
©
Suk Hoon Han
올
여름엔 몸이 견디기 힘들어 할 짓들을 많이 했다. 원체 퍼져서 쉬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긴 하지만, 이번엔 여느 때보다 좀 더 무리한 일들을
많이 한 것 같다―젊었을 때처럼. 문제는 내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이고, 더 심각한 문제는 내가 젊지 않다는 걸 자꾸 망각한다는 것이다. 내 나이엔 이제 몸도 사리고, 점잖고도 느릿느릿한 발걸음과 몸짓으로
품위를 지켜야 하겠거늘, 어리석게도 예전 생각만 하고 내 몸을 막
굴린다. 그러다보니 육신의 안과 밖이 버티지 못할 정도의 무리한 일과
운동 따위를 해버리고 만다. 그 결과 몸 구석 구석이 돌아가면서 고장났고,
여름 내내 다양한 통증에 시달렸다. 매일 통원 치료해야 하는 아내 데리고
종합병원 오가는 와중에, 내 병 고치러 여기저기 잡다한 의원과 약방에도
다니다보니 여름이 다 가버렸다. 여름방학에 대한 원대한 계획이 서있었으나,
방정맞게 몸을 굴리고 다치다 보니 방학도 이제 거의 다 가버렸다.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게 인생인가.
나이를 먹고 또 먹어도
철부지같이 점잖치 못한 나 자신을 바라보며, 왜 난 중후한 중년의 나이에
걸맞는 신사처럼 현명하고도 품위있게 살지를 못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낡은 셔츠와
반바지, 쪼리 차림에 백팩 지고 다니고, 딸내미와
서로 때리며 장난이나 치고, 방학이라고 허구헌 날 밤이면
맥주 따서 마시며 다운받은 영화나 보다가 괜히 필받아 눈물 질질 흘리고... 스스로를 객관화시켜보니
딱 철부지의 모습이다. 왜 난 주변의 여러 훌륭한 중년의 어른들처럼 점잖고
품위있지가 못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바로 그게 내가 의도한
바대로 살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양면성은 한 편으로는 점잖고 품위있는
학자 상을 설정해놓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모든 그러한 '상'으로부터
자유로운 개구장이나 방랑자 상을 품고 있었다. 양면 모두가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데, 어느 한 쪽이 장기간 너무 전체 상을 지배하고 있다보면
억눌린 다른 한 쪽이 삐져나오게 된다. 아마 이즈음 대학엘 많이 나가느라
너무 교수 티 내며 점잔을 떨었던가 보다. 그래서 방학이 돼선 정돈되지
않고 격식을 갖추지 못한 모습과 행동이 마구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는가
보다. 사회적 지위와 나이를 고려하지 않은 제멋대로의 라이프스타일
덕분에 이번 여름엔 탈도 많이 나고 상처도 많이 입었나 보다. 그렇다면,
결국엔 뜻했던 바대로 굴러가게 되는 게 인생이라 해야 할지.
나는
나의 양면성 중의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가 없다. 한 편으로는 모든
일정이 타이트하게 짜여져 있어서 일 중독자처럼 수업 준비하고, 공부하고,
글만 쓰는 학자와 같은 상,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인생의 무엇
하나 확정된 것 없이 좌충우돌하며 마음 가는대로 심신을 굴리는 방랑자의
상, 이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여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성숙한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전자로만 밀고 나갈 때 나는
고리타분하고 메마른 늙은이가 돼버릴 테고, 후자로만 치닫을 때 나는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루저'가 돼버릴 테니.
모순된 양면성으로
인해 나 자신의 삶이 불안정한 것에 대해선 내가 불평할 이유가 없다.
내가 뜻하는 바대로 살아서 그리 되는 것이니까. 문제는, 양면성의 견지로
인해 피해를 보고 상처입는 내 주위의 사람들이다. 내 주위의 가까운
이들 대부분이 나의 양면성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예컨대 내가 강의실에서 '교육 재정'에 관한 설명을 할
때 농담처럼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다음 이야기처럼, 일단 내
자식들이 대표적인 희생양이 되는 것 같다:
'나는
교육행정과 정책의 모든 분야 중에서 재정에 가장 관심이 없는데, 이건
내가 원래 돈에 관심이 없는 인간이라 그러하다. 난 돈에 욕심만 많고
통 관심이 없어서, 내 집의 재정 문제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그러다보니
집안의 경제 문제에 대한 유일한 원칙은 '있을 때 쓰자'이다. 그래도
그럭저럭 먹고 살고는 있는데, 문제는 나의 이같은 원칙 때문에 내 자식들의
'사회경제적 지위 정체성(socioeconomic
status identity)'이 모호하다는 점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있을
때"엔 해외여행도 가고, 외국의 오성급 호텔에서 자기도 한다.
화려한 호텔 방 침대에 앉아 내 딸은 이렇게 묻는다: "아빠, 혹시
우리 부자였어?"
하지만 "없을 때"엔 그런 사치를
못부리고, 그래도 끈질기게 국내여행은 다니는데, 이를테면 전라남도
산골의 어느 민박집에서 자게 될 때, 처마에서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애들에게 라면이나 끓여주고 있노라면 딸이 이렇게 묻는다: "아빠,
우리 집 망한거지?"
해서, 내 자식들은 자신이 어느
사회경제적 계층에 속해있는지 아직껏 그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있을
때"엔 참 좋겠지만, "없을 때"엔 식구들이 헐벗게 된다.
항상 "있는" 살림을 유지하기 위해 모범생적인 나의 상에만
집중했더라면 나의 경제적 삶은 훨씬 안정됐겠고, 그럼 내 자식들에게
더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의 조건을 제공해줬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일종의 회한이 있다. 하지만 하나의 아상에만
치중한 나머지 반면의 방랑자적 아상을 짓눌러서 나의 정신 건강이 위태로워졌다면 그것도 식구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있으니, 내 생긴 꼴대로 살아온 것에
대해 회한을 품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양면성이란
게 사회적 가치관의 기준으로 어떤 지탄을 받건 말건 간에 나는 생긴
꼴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나름의 결론을 견지하고 있다. 나아가, 나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중년의 남녀들도 자기 내적인 이면성을 무시해선
안된다고 믿는다. 허나 그렇다
하여 양면성에 내재된 모순이 배태하는 파괴성까지 옹호하겠다는 건 아니다.
모순의 간극에서 돌출되는 예측불허의 행동은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모순을 극복하는 어떤 경지에 다다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모순된 아상의
통합과 극복이란, 내 내면의 신성, 또는 참된 자기와의 깊은 연계 속에서만 실현
가능한 일이라는 것 쯤은 나도 알고 있는데, 과연 그런 게 육신이 현현한 현상계에서 가능한 일이기나
한지, 답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나는 늘 그 극복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추락하고,
또 좌절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고 자기통합과 극복을 꿈꿔야 하는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끝없이
기도하며 구할 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