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로병사

생로병사 (2011/6/21)

올 5월과 6월에 유독 초상집 방문이 많았다. 벗과 지인과 친척의 부모들이 줄이어 돌아가셨다. 강남의 몇몇 병원 영안실은 일주일에도 여러 차례 왕래했다. 모두 칠, 팔십대에 돌아가신 분들이라 대체로 천수를 누리다 가셨다며 호상이라 하여, 특별히 침울하고 애통해 하는 분위기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오랜 만에 만난 사람들과 소줏 잔 기울이며 떠들고 농지꺼리도 하다가 왔다. 허나 장례식장 안의 옆 방에서는 처절한 통곡 소리가 들리는 곳도 있었다. 모두가 '호상'일 수는 없겠다. 집안의 할머님 한 분도 돌아가셔서 화장터에도 다녀왔다. 삼십 도를 웃도는 뜨거운 날, 까만 정장에 검은 타이 매고 눈부신 햇볓을 고스란히 받았다. 왜 땡볕은 죽음이나 슬픔과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화장터에는 젊어서 죽은 이들의 문상객들도 적지 않았다. 곳곳에서 비통한 울음 소리가 이어진다. 화장터 골짜기가 사람의 슬픔에 절어있는 듯 했다. 어린 자식을 보낸 부모의 찢어지는 울음에는 전염성마저 있는 듯, 옆에서 지나가는 것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 이런 인간의 삶을 단 번에 파악하신 젊은 붓다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셨던 게지...

나의 집안에도 우환은 끊이지 않는다. 생로병사의 싸이클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럼에도 내곁에 일어나는 우환에 대해 의연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집안의 어르신들은 지속적으로 이런 저런 병마에 시달리신다. 아내도 잔병치레가 많았었고, 최근에는 큰 병도 얻었다. 병이 걸린 당사자들에게도 또 그 가족들에게도 삶은 결코 녹록치 않다. 나는 언제나 홀로 건강하고 튼튼한 것 같지만, 오십에 다가가는 내 나이에 함부로 자신할 수는 없는 일. 요즘 보는 이들마다 내게 말랐다 하기에 브이 라인 만들었다며 웃고 넘겼지만, 내 몸 안에도 무슨 병이 자라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죽음도 병도 삶의 당연한 일부이다. 주어진 대로 받아들여야 함을 안다. 병마도 다 이유가 있어 주어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병을 통해 삶속의 나를 다시 돌아볼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무엇을 이루려고 그렇게도 아둥바둥 대고 사소한 작은 일들에 그렇게 집착하며 살아왔던가 반문하며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왜 태어나서 왜 살아가고 있는지 답도 없을 듯한 그 뻔한 질문을 다시 한 번 심각하게 끄집어내 보라고 주어진 귀한 기회라고 믿는다. 지혜롭게 병마를 수용한다면 우리는 그간 혹사시켜왔던 자신의 몸을 정성스레 돌보고, 그럼으로써 몸보다 큰 자신의 전체를 잘 돌아보고, 그리하여 죽음으로 가는 나의 삶의 남은 길을 잘 닦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몇 주 전에 가족들 데리고 나선 지방 나들이 길에 충주의 5일장을 구경했는데, 그때 둘째 딸내미가 연꽃 씨 여나믄 개를 사왔다. 직경 1센티미터 정도의 그 씨의 꼭지를 칼로 약간 따서 물속에 집어넣었더니, 씨를 팔았던 아낙의 얘기대로 신기하게도 씨에서 싹이 트는 것이었다. 그 싹이 점점 자라나서 10센티도 넘는 줄기를 이뤘고, 그 씨들을 어항에 넣었더니 줄기에서 연잎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저 단단한 씨에서 생명이 움튼 것이다. 새로운 생명은 뭐든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늙어가고 있는 나 자신도 저 움튼 싹이라는 새로운 생명의 연속선 상에서, 즉 그 싹의 줄기가 자라나서 이룬 모습으로 이해할 수 없을까? 내가 태어났을 때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지금까지 키워온 것으로 상상할 수는 없을까?

스승님처럼 존경하는 교수님의 출판기념회에 다녀왔다. 연회장을 빌어 수백 명의 하객이 오는 여느 기념회와는 달리, 식당의 아담한 방에 십여 명만 둘러 앉아 오순도순 담화하는 자리여서 좋았는데, 초청받은 손님들은 삼십대에서부터 칠십대까지 그 연령대가 다양했다. 사회계층적 측면에서 봐도 나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서부터 재벌가 사모님까지, 다양한 계층이 망라됐다. 그럼에도 모두 격의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대화가 오갔다. 세대와 계층의 경계 따위는 볼 수가 없었다. 모인 모든 이들이 상호존중의 자세로 타인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졌는데, 그 중심에는 이날 이 모임의 주인이신 교수님의 인격이 자리잡고 있었다. 역시 열린 마음으로 타인들을 존중하고 세상을 위해 노력하며 사시는 저런 교수님께서는 칠십 세에 이르러도 저렇게 밝고 젊으며 쾌활한 모습을 지니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임에는 상호 칭송과 찬양이 있었으니, 젊음은 노숙함을 찬양했고, 노숙함은 풋풋한 젊음을 칭송했다. 젊음과 늙음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이 모임에서 연령 상으로 중간 쯤 자리잡고 있던 나는 과연 어엿한 노숙함 쪽으로 제대로 가고 있는가?

글세, 삶의 고락에 대해, 젊어서는 차가운 음료수를 벌컥 벌컥 들이키듯 단숨에 해치워버리는 것을 좋아했으나, 이제는 귀한 차를 아끼듯 삼가며 조금씩 음미하곤 한다. 순간과 사람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많이 자라난 것이라고 믿고 싶다. 나라는 생명의 싹이 지금까지 오십 년 가까이 자라왔고, 그렇다면 언젠가는 나라는 삶의 줄기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활짝 피어날 것인가.

그 꽃을 피우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겠다. 스승님 자주 하시는 말씀대로 내 안의 더 깊은 나를, 나의 심층을 구함으로써 생로병사의 끝없는 순환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나로서 자라나고 싶다.

그 전에, 이번 여름은 병상의 아내를 돌보는 일이 예약돼있다. 아내의 고통을 나눌 방도를 구해야 한다. 자기실현 이전에 타인을 돌봐야 한다. 나의 감정, 그리고 나의 이성은 그게 올바른 순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나의 영성이 그런 앎을 이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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