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학습

평생학습 (2011/3/13)

이번 학기도 아주 많은 강의를 맡았다. 그나마 집필과 연구를 위한 내 시간을 갖기 위해 주중의 하루는 쉬는 날로 정하고 작년보다는 출강하는 대학의 수를 줄인 것이다. 그 수업들 하나, 하나를 다 열심히 하며 새 학기의 2주일을 보냈다. 소수의 대학원생 대상 수업도 있지만 한 반에 70명에 이르는 다수 학생 대상의 수업이 많다. 많은 학생들을 앞에 놓고 강의를 하다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체 난 언제 이런 수다쟁이가 돼 버린 거지?' 두 시간, 또는 세 시간 짜리 수업 내내 쉬지 않고 떠들어 댄다. 그리고 대체로 학생들은 그 긴 시간동안 딴전 안 피우고 내 말을 잘 듣는다. 듣다가 웃기도 하고, 심각해지기도 하고, 다양한 반응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나는 강의를 잘 하는 것 같다. 지난 학기에도 이 대학, 저 대학에서 우수 강사상을 탔다. 매 학기, 의례 받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이제는 상을 받고 별로 고마워 하지도 않을 만큼 오만해지기까지 했다. 어느 학생은 내 수업을 '3대 명강의' 중 하나여서 꼭 들어야 하겠다고도 했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강의를 잘 하게 됐을까?―'손발이 오글거리는' 발언일 수 있으나, 순전히 탐구심의 동기에서 유발된 질문일 뿐이다. 내가 이를 스스로 의아해 하는 이유는, 어렸을 적, 젊었을 적의 나의 연장선상에서는 지금과 같은 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동기의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고, 반항적이었으며, 사춘기 때에는 말 수가 아주 적었다(지금도 우리집 식구들은 나를 과묵한 남자로 알고들 있는데, 내 학생들은 그리 여기지 않는 듯 하다―항상 떠들고 있는 나만 봤으니). 그 시절에는 다소간 자폐적 성향도 있었으며 틱 증후군마저 몇 해동안 갖고 있었다. 아마도 지나치게 예민했던 감수성으로 인해 사춘기에 학교 및 또래 사회를 수용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고, 그러다 보니 혼자서 책과 음악에 파묻히기 일쑤였다. 요즘 말로 하자면 오타쿠나 히키코모리적 증세를 보였다고 할까. 중학생 때의 나는 자기파괴적이었고, 때로 비겁하거나 폭력적이었다. 고교시절에는 학교와 기성의 권위를 극도로 혐오했고 대학교 초년생 때에는 우울증에 빠졌다.

결코 어디에 자랑스럽게 내보일 성장기 기록이 못된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도무지 그토록 자폐적이고 불만에 가득 찼던 그 소년이 지금처럼 수다쟁이로 하루 종일 강의실에서 떠벌리는 중년 아저씨가 됐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뿐 아니라 혼자 방구석에 쳐박혀 있던 사춘기 때와는 판이하게, 지금은 만나는 이들도 참 많다. 친구도 많고, 술 마실 상대도 많고, 따르는 제자들도 많고, 늘 사람 만나느라 바쁘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내게는 '비즈니스' 또는 '거래처'로 만나는 상대가 아니고, 인간적 우정과 애정으로 만나는 이들이며, 그들과의 만남에선 예외없이 서로의 진솔한 속내를 드러내는 가치있는―非有爲的인?― 대화를 나눈다. 어쩌다 나는 이런 아저씨가 돼버렸을까?

아마 지금의 내 모습이 원래의 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원래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과 세심하면서도 깊이있는 대화를 나누며 서로와 세상에 대한 앎을 키워가는 것을 열망하고 또 즐기는 개성을 타고 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오리지날 설계가 이렇게 태어난 인간이었으나 성장기에 내면의 섬세함과 감각의 예민함을 적절히 세상에 적응시키지 못했던 탓에 자폐적이고 반항적인 소년이 돼버렸고, 그러나 다행히도 청소년기 이후의 삼, 사십 년에 이르는 세월이 원래의 나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도록 다양한 훈련의 기제들을 제공해줬던 덕택에 원래의 나를 복원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 훈련은 실은, 오십에 다다르는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 아니, 나는 그 훈련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산다. 그리고 나는 원래의 나일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이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에 만족한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만족은 이번 주 '책의 지혜'에 올린 오쇼 라즈니쉬가 설명한 만족의 개념과 일치한다: 나를 바꾸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해서 손에 움켜쥔 만족, 그리하여 앞으로도 계속 채워지지 않을 후속의 욕구를 파생시킬 일시적 만족이 아닌, 하늘로부터 받은 축복의 부산물로서의 만족.

헌데 대화를 통한 인간 지향성을 즐기는 나의 이면에는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적인 나가 확고하게 존재하고 있다. 나는 만남을 중시하고 즐기기도 하지만, 반면에 혼자 구석에 쳐박혀있는 것도 매우 좋아한다. 아니, 후자 없이 전자가 제대로 작동되지도 않는다: 즉, 내가 사람들과의 깊은 대화를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 동굴 속에 침잠해있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나는 사람들 속에 너무 오래 있으면, 마치 힘을 많이 쓰면 에너지가 떨어지는 아톰과도 같이 힘과 성능이 저하돼 버린다. 해서, 별 수 없이 나 혼자 에너지 충전을 위해 본부로 돌아와 쳐박혀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혼자서 힘을 회복하고 나면 또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기운이 샘솟는다. 아마 나의 오리지날 프레임에는 사람 지향성과 은둔자적 성향이 공존하고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나는 내 인생의 어떤 시절보다 사십대 이후의 내가 좋다. 물론 완벽과는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 결함 투성이의 평범한 인간임은 확실하지만, 인생의 다른 시절과 비교해보자면 나이 들어서의 나 자신이 훨씬 만족스럽다는 말이다. 내가 예전에 비해 지금의 나에게 더 만족할 수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과거의 내가 워낙 형편없었기 때문이겠으나, 좀 미화해서 말하자면 나의 양면성이 평화롭게 호혜적 관계를 맺으며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혼자만 있고 싶은 나, 그리고 타인과 손을 잡고 싶은 나, 이 두 면이 모순되거나 상호배타적이 아니라 서로를 더더욱 북돋워주며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홀로 있음은 나만의 개성을 키워주고, 바로 그런 나의 개성 때문에 타인들과 의미있게 나눌 것들이 자라나며, 타인들과의 관계 덕분에 또 나 홀로 파고들 풍부한 재료들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렇듯 나 자신의 일견 모순돼보이는 양면성의 선순환을 이끌어내기까지 수십 년이 소요됐다. 나는 앞으로도 이와 같이 나 자신에 대해 배우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나를 어느 한 쪽에 단정지어 버리지 않고 계속 내 안의 여러 면모들의 가능성을 테스트해온 것이 현재의 만족을 선사해줬다고 믿는데, 그런 테스팅 작업이 어디서 발동걸린 것일까? 그 테스팅의 의지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나의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상상하고 체험하는 것이 나의 신앙 생활이다.

내가 가르치는 한 과목 이름에 평생학습이라는 개념이 포함돼있기도 한데, 나의 신앙과 수행,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배워가는 과정들이 모두 평생학습인 셈이다. 그래서 나의 신께서는 내게 "You will learn"이라는 계시를 주셨을 게다. 평생 배울 수 있다면 실로 축복받은 삶이겠다. 칠십 살이 넘어서도, 팔십이 돼서도 계속 배우기를 소망한다.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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