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극복의 길 (2011/2/19)
 



© Suk Hoon Han                                                                                                                                                                     
 
 

삶에서 마주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을 볼 때, 나는 그들이 세월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고 인생에 대한 나름의 진정성도 갖고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나이가 무색할만큼 지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과도 조우하게 되는데, 그 조우의 빈도가 잦음이 불만스럽다. 오랜 만에 만난 친척이 우리집 식구에게 또 이렇게 물었다: "아직도 교회 안 나가세요?" 이런 말에 대해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짜증 같은 것이 나지도 않는다. "아직도"라는 부사 속에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들 모두가 종국에는 교회에 나오게 되고야 말 것이고, 필히 그래야만 한다는 단정적, 결정론적 독단이 담겨있다. 바로 그 독단 때문에 개신교도와는 아무런 대화도 일어날 수가 없음을 지난 수십 년의 경험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버린다. 과거에는 때로 이런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아니, 아직도 교회를 나가세요?" 그러면 개신교도는 벌컥 화를 내버리기 때문에 이건 유의미한 대응책이 못된다. 별 도리가 없다. 그저, 당신만큼 우리도 우리의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는 점을 조금이라도 존중해주길 바란다고 말할 밖에. 허나 내 마음속에는 이런 고약한 반응도 여전히 꿈틀거리긴 한다: '당신이 신을 알아?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이런 반응을 실제로 내 혀로써 뱉어낸다면 나도 상대방과 똑같은 수준에서 티격대고 있을 뿐이겠다.

그래, 우리는 우리의 한심한 수준을 뛰어넘고자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무례한 개신교도인 그 사람이나, 신랄한 비종교주의자인 나 자신이나. 무지와 아집과 독단으로 점철돼온 이 인생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그것들을 뛰어넘어 보고자, 극복하고자 뭔가 초월적 가르침 따위를 찾아나섰는데, 그놈의 가르침마저도 무지와 아집과 독단으로 제 손아귀에 쥐어보고자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렸다. 가르침에 대한 자세는 겸허하면서도 중단없는 추구가 돼야 하거늘, 오만한 소유욕에 그칠 때, 가르침의 본질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단, 그 천박한 발버둥도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극복을 위한 애씀의 표현이기에 더더욱 처절하고 안쓰럽기는 하지만. 실은 나도 그런 발버둥을 하며 살아오고 있지 않은가.

둘째 딸이 태어났을 때 아내는 산후조리원에 잠시 머물렀다. 당시에 나는 직장생활 중이었는데, 퇴근 후 조리원에 갔더니 아내는 자고 있었고 아기는 신생아실에 보내졌었다. 신생아실에 가보니 직원은 아무도 없는데 한 아기가 마구 울고 있었고, 그 아기가 바로 내 딸이었다. 나는 얼른 아기를 들어서 꼭 품에 껴안았다. 내 품에 안기자 아기는 금세 울음을 멈췄다. 내 어린 딸이 홀로 그렇게 울고 있었던 것이 속이 상해서 걔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가야, 아빠가 다시는 너 혼자 울게 하지 않을게." 그때 그렇게 다짐한 말 때문이었을까, 실제로 나는 둘째를 애지중지하며 키웠고, 초등 5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때때로 등에 업고 놀아준다. 그때 다짐한 그말 때문이었을까, 내가 둘째에 대해 품게 된 강한 연민은 사실, 첫째 딸에 대한 내 태도와 비교해보자면, 일종의 편애로써 작용하게 됐다. 둘째에 대한 나의 다짐은 아이가 자라면서 삶에서 조우하게 될 예측할 수 없는 제약들과 해악들을 죄다 극복해내겠다는 비현실적인 과욕에 다름아니다. 현실의 극복을 위한 과욕은 또 다른 극복할 과제를 내게 부과했으니, 그건 내가 네 살 더 먹은 첫째는 제쳐놓고 둘째를 편애하는 마음의 병이었다.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며 이 병으로 인해 적지 않은 과오를 저질렀고, 그래서 첫애가 받은 상처를 보상해주고자, 애비로서의 내 한계를 극복해보고자 또 다시 발버둥을 쳤었다. 삶은 극복해야 할 일들 투성이다. 강한 연민, 강한 집착이 그런 일들을 증가시킨다.

두 딸들이 아직 올망졸망한 유아였던 어느 겨울 날, 나는 처자식을 차에 태우고 양평 쪽으로 1박2일 나들이를 떠났었다. 헌데 돌아오는 날 예상치 못한 폭설과 맞닥뜨렸고, 평소 2시간도 안 걸릴 거리를 하루 종일 걸려서 겨우 귀가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희안하게도 하루 종일 차 안에서 잠들어 있었고,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연약한 처자식을 차에 태운 채 사방에서 자동차들이 뒤엉키고 부딪치고 있는 설원을 뚫고 나왔던 경험은 하나의 트라우마처럼 뇌리에 각인돼 버렸다. '이 애들을 무사하게 따스한 집까지 데리고 가야만 하는데...'라는 목표로 하루 종일 눈과 싸우며 운전했다. 나는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현실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싸웠다. 결과는 마치 내가 장애를 극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나는 내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를 새삼 깨달았다. 튼튼해보이던 내 차도 연약한 쇠판대기에 불과하고, 믿을 만 해보이던 이 도시의 도로 인프라도 맥없이 기능을 상실하는 허약한 시스템에 불과했고, 애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내 몸뚱아리 하나에 의존해야 했는데, 그 몸은 얼마나 불완전하고 부실한 동력원에 불과한가 하는 것을 절감했었다. 현실의 제약을 극복하려는 몸의 에너지와 정신력은 물론 다 필요한 것들이다. 생존 의지는 필수적인 것이다. 허나 그 모든 것을 구비한다 해도 현실 너머로의 비상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한 생존 자체를 보장할 수가 없는 것이 인생살이 아니겠는가. 나는 나의 존재의 왜소함과 나약함을 새삼 절감했다. 현실의 극복이 나의 극복은 아니었다. 현실을 아무리 극복해도,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나는 남아있다.

나이 먹은 친척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어보겠다는, 현세를 극복해보겠다는 의지를 품은 것이 애처롭다. 시건방진 말이지만, 영성 모색과 수행의 여정 속에서 인간과 현상에 내재된 깊숙한 지옥과 드높은 천상을 체험하며 살아온 나의 눈에는 개신교 교리 체계의 부분적 노선을 맹종하는 그가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기만 하고, 그래서 그가 더 애처롭다. 허나 내 앞 길을 간 선사들의 눈에는 나 역시 그렇게 보일 것 아니겠는가? 아니, 십년 전의 나 자신만을 떠올려 봐도 애처로울 따름이다—자기연민의 심리에 빠지려는 건 아니다. 우리는 끝없이 극복할 산들과 맞닥뜨리며 앞으로, 앞으로 삶의 길을 헤쳐가야 하는 존재이고, 그 끝이 과연 죽음과 함께 도래할런지 내 짧은 식견으로는 확언할 바가 못된다. 내가 아는 것은 죽음의 그 순간까지 이겨내며, 극복하며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처절한 투쟁과 극복의 과정이 축복임을 깨달아야만 한다는 점, 그 깨달음을 실감하는 것이 인생의 중대한 숙제라는 점까지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를 연마한다. 극복은 항상 힘들다. 매우 힘들다. 나의 극복을 위한 나의 연마가 이제 와서 더 힘들어지는 이유는 나의 제약들을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더 정확하게 꿰뚫고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은 안정이 아니라 싸움이다. 싸워야 할 대상인 나의 숱한 약점들과 악을 무시한다고 해서 평화가 오지 않는다. 오직 그것들과 용감하게 마주서야만 비로소 평화가 나를 찾아온다. 안정이 평화를 주지 않는다. 안정은 연기와 같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험과 극복만이 평화를 수반한다. 물론 모든 단계의 평화는 또 새로운 단계의 여정을 펼쳐주고, 새 여정에서 나는 또 다시 극복할 과제와 맞서게 되지만. 나는 수행의 길의 필수 요건이 용기와 인내라고 믿게 됐다. 나를 부수고, 나의 틀을 깨뜨리고, 나를 뛰어넘을 때 부과되는 고통을 받아들일 용기, 그리고 그 고통을 가만히 앉아서 고스란히 견뎌낼 인내력.

종교에서 촉발된 나의 신앙 수행은 용기와 인내보다는 안온한 환상에의 안주에 치중하는 종교성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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