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상(我相)
버리기 (2011/9/7)
©
Suk Hoon Han
아침
일곱시, 가을 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대학 캠퍼스를 걸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으려는 걸 막는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나는 삶의 답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 거다. 즉,
'삶이란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온전히 있는 것이다'라는
답을. 다만 그 답이 대개 머릿속에 저장만 돼있어 실제로 나의 삶을
이끌지는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일 뿐. 하여, 나는 초가을 아침에
다시금 그 답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봤다. 그냥 지금, 여기에 있기로
했다.
무엇이 그러려는 나를 막는가? 내가 존재하는 지금, 여기에
속하지 않은 것들, 즉, 과거와 미래, 다른 곳에서의 다른 순간들이 나를
막는다. 아니, 그것들에 대한 나의 기억(회한, 고통)과 예상(걱정, 계산)
등이 나를 막는다. 결국 나를 막는 건 나 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얽매어 있는 거다.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한 거다. 진정한 나,
참된 나, 자기the Self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나를 얽어매는 가짜 나,
아상,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겠다. 그래야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초가을 아침 바람에 살랑거리는 저 꽃과 온전히 함께 있을 수 있다.
마하리쉬
사부는
이렇게 일러준 바 있다: '진아는 모든 아상을 부정한 뒤에 남는 것이다.'
나의 아상은 단순하지가 않다. 나의 아상은 아주 많다. 그것들 중의
최고는 '천사'인 것 같고, 최저는 '악마'인 것 같다. 천사도, 악마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평소에 나 자신이라고 믿었던
아상들을 버려야 참된 나가 나온다니, 한 번 그 다양한 아상들의 재고를
점검해보자. 다양한 아상들을 빚어내는 에고라는 나의 표피적 인격이
작동하는 힘이 주로 자존심이라는 심리작용에서 나오는 듯 하니, 자존심의
강약을 기준으로 삼아 나의 아상들을 분류해보자. 즉, 나의 가장 자랑스러운
아상에서부터 가장 부끄러운 아상까지 그 스펙트럼을 조망해볼 수 있겠다.
나의
가장 자랑스러운 아상은 무얼까? 아마도 소명의식이 있는 선생상이 아닐까
싶다. 물론 '아상'일 뿐, 내가 진정으로 그런 수식어를 붙일 자격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그렇게 불리워질 자격이
있다고 믿었었다, 어리석게도. 두 번째는 글 쓰는 이, 창작가라는 아상일 것
같다. 나는 원천적으로 자신만의 뭔가를 만들어내는 걸 최고로 여기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글 뿐 아니라 '필' 받아 피아노로 새로운
테마를 만들어내는 때도 스스로 매우 대견해 하고, 여생의 목표도 창작에
두고 있다. 세 번째 쯤에 시카고대 Ph.D.라는 '쯩'이 들어가겠다. 껍데기,
문신에 불과할 수도 있을 학위지만, 그안엔 나와 여러 사람들의 노고와
희생도 분명히 담겨있으니까. 네 번째로 '좋은 아빠' 상이 나온다. 특히
요즘들어 딸들에게 더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살고 있다고 느낀다―실로
내가 그런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인물이라는 말이 아니고.
이런
게 긍정적인 아상들이겠다. 이것들을 내다버리라는 게 스승의 가르침이다.
헌데 버리기 아깝다.
저 밑바닥에는 부정적인 아상들도 있다.
실은 아주 많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적당히 포장하여 가려 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저의 둘 정도만 거론하자면, 무능한 술주정뱅이의 아상이
있다. 물론 실제로 나를 주정뱅이로 보는 이는 없다고 믿는다―스스로를 주사도
전혀 없는 신사적인 애주가라고 여기는 이면의 아상 또한 있다.
그러나 돈버는 일에 대한 열정이 결핍된 나는 스스로를 현실적 무능력자라고
느낄 때도 있거니와, 자칭, 타칭 '애주(愛酒)'가 나태한 정신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길 때도 있다. 다른 하나는 위선적인 비겁자의
아상이다. 좋은 말로 내 내면의 복잡한 작용들을 '내적 모순의 화해'니,
뭐니 불러 보지만, 사랑하는 이를 증오하고 원망하기도 하며, 사랑하는
이야 어찌되건 간에 알량한 나라는 개체의 생존만을 추구하기도 하는
모습은 비겁한 위선자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더 미워해야
사랑할 수 있나요?'라며 절규하는 노랫말도 있지만.
이런 부정적인
아상들을 버릴 수 있는가? 이것들도 내다버리라는 게 스승의 가르침이다.
버리지 못함은 그 잘난 양심―자책이란 기능이 남아있는― 때문인가?
그러나 이것들도 버려야만 참된 나가 나온단다. 그래야만 내가 해방될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이것들을 내다버릴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있을 때(어떤 존재상태일 때) 이것들을 내다버릴 수 있을까?
주로,
아상을 만들어내는 에고로부터 두려움이라는 수행 최악의 적이 나온다.
이혼과 빈곤의 나락을 동시에 겪은 적이 있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저자
조안 로울링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최악의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났지만
그럼에도 난 여전히 살아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해방되었다.'
로울링의
이같은 깨달음은, 최고와 최저의 아상을 내다버리기 위해서는 내가 실제로
그것들을 겪어낼 수밖에 없음을 전언하고 있는 걸까? 만약에 이런 겪어냄이
참된 자기실현의 도정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라면, 그러면, 지복의
평화 같은 건 자기실현의 도정일 수밖에 없는 삶에서 애써 구할
바가 못된다. 천로역정 자체가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바이다.
감사의 미소와 함께. 천로역정 속에 지복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위의 질문에 대해 자답해본다: '나는 내게 주어지는
삶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존재상태로 있을 때 해방될 수 있다.'
싱겁기 그지 없는 답이다. 사실 세상사의 진짜 답들은 다 싱겁지 않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