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론적
자기인식 (201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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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융 학회에서 보내주는 뉴스레터에 분석심리학 최고 권위인 이부영 교수께서 목적론적 자기인식에 관해 쓰신 내용이 있었다. 현대의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는 늘 인과론적인 관점에서만 자신을 바라본다. 즉, 과거의 여러 원인들의 귀결로서 지금의 자기를 바라본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지 않은 목적론적 관점에서 자신을 본다면 미래에 언젠가 도달해야 할, 이루어내야 할 최상의 자기, 또는 실현된 자기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볼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지금 이 순간은 과거의 업보의 결과로써만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이루어낼 고양된 존재에 다가가는 꼭 필요한 단계로써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관점이 누구에게나 중요하겠지만,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현재의 자기에 대한 인식에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대학원 수업 때 목적론적 관점으로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의 말에 대해 한 생각 깊은―그리고 존경할 만한 선생의 길을 가고 있는―학생이 질문했다. 우리가 미래에 이루어야 할 상이 반드시 훌륭한 것이냐고, 혹시 그것이 악하거나 나쁜 상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나는 그 질문이 삶의 무게에 대한 체험에 터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질문에 대한 나의 즉답은, 우리의 앞날이라는 것은 알 수가 없는 것이고, 미래의 자기 상이 어떠해야 할지는 당사자만이 정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그것이 '천사'가 될지, '악마'가 될지 제3자는 왈가왈부할 수 있을 문제가 아니고, 당사자가 자신의 상(像)을 천사로서 선택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러나 나의 답은 뭔가 미진했다. 천사와 악마, 빛과 어둠 따위의 이분법적 분별심으로 논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와 문명의 제약 속에서 윤리적 당위로 지지받는 '천사'나 '빛'이 '악마'나 '어둠'보다 더 우월하다는, 더 낫다는 식의 이분법적 가치판단으로는 자기실현이라는 심대한 길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실현은 내면의 천사와 악마, 빛과 어둠 등의 대극을 다 통합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와 문명의 윤리적 당위―'착해야 한다'는 식의―의 제약을 뛰어넘는 경지의 대극의 합일,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한 개인이 미래에 이루어내야 할 상을 말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종교인들의 관점에서 자기실현이란 자기 안에 내재된 영성을 꽃피우는 것이라 하겠다. 이건 어떤 스승의 표현을 빌린 것인데, 영성의 꽃피움이란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것, 작은 새싹이 거목이 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완성된 경지인 개구리와 거목은 윤리적으로 선하거나 악하다 할 수 없다. 선악의 경계를 허물고 선과 악 모두를 통합한 경지이다. 개구리나 거목을 사회와 문명의 기준을 갖고 선하다, 악하다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문명의 기준을 넘어서 자연과 우주의 관점에서 지선(至善)의 경지에 다다른 것 아닌가. 개구리는 완성된 한 개체로서 자연의 무한대로 복잡한 씨줄과 날줄의 인드라망 안에서 당당하고도 아름답게 자기에게 부여된 소임을 다하는 생물체가 된 것이고, 거목 또한 어쩌면―인간적 시각에서 보자면― 개구리를 뛰어넘는 영역이나 수준에서 숱한 벌레들과 짐승들의 집 노릇도 해주고, 인간이란 생물이 쉬어갈 그늘도 만들어주는 등의 제 소임을 다하는 생명체가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인간인 나의 자기실현의 경지, 내가 미래에 다다르게 될, 또 이뤄내야 할, 지금의 나보다 거대하고도 위대한 상은, 인간 문명 이전에 자연과 우주가 내게 심어놓은 소임을 완수해내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자연과 생명과 공존하며 무릇 생명들의 온전한 성장과 꽃피움에 나름의 기여를 해내는 존재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자연과 생명의 파괴에 힘을 보태는 존재일 수는 없지 않을까? 이렇게 볼 때 실현된 자기로서의 나의 상은 시대와 사회의 통념과 윤리적 잣대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경지의 존재라 하겠다. 인간적 선과 악을 뛰어 넘어, 천사와 악마를 다 끌어안고 우주만물의 공생의 질서 속에서 제몫을 해내는 존재이겠다. 나라는 존재는 이미 그런 몫을 부지불식간에 하면서 지금도 성장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다만 의식의 존재인 인간으로서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그런 몫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그건 방금 말한, 거창하고도 추상적인 우주적 이상을 말로써 외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도 구체적으로 지금 이 순간 내 앞의 한 생명에게 친절을 베푸는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미래에 이뤄내야 할 상, 자기실현된 상은 사회적 잣대로 훌륭하다, 못하다 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상은 이 세상과, 자연과, 우주와의 관계 속에서 훌륭하게 제몫을 해내는 상이어야만 할 것이므로, 결국 그 상은 지선의 빛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허나 이런 나의 실현될 상을 빛이다, 어둠이다 규정하는 일은, 오직 신과 나 자신에게 달린 일 아닐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