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 (20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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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굉장한
여성을 만났다. 잘 나가는 CEO인데 구도자다. 현실에서 좀체로
결합이 되지 않는 두 역할이다(행동주의적 함의가 깊은 '역할'이라는
개념을 존재론적 용어인 '구도자'에 적용시켜도 될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가 구도자임을 의심할 수가 없다. 눈에서 광채가 나고, 음성에는
맑은 기품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개인적 삶과 사회적 역할을
분리시키지 않고, 개인적 구도를 사업 현장에서도 실현하고자 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런 시도가 현실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야말로 자아실현의 삶이 현세의 성공으로 꽃 피운 실제의 예다. 나는
이러한 예를 많이 발굴하여 내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현실은 이러이러하다는
통념에 찌들어 새로운 삶의 상상을 도무지 할줄 모르는 많은 학생들에게.
나의 귀한 제자들도 이 CEO 구도자처럼 세상에서 우뚝 솟아오르도록 키워주고
싶다.
내 제자들 중의 소수는 나의 시각을 잘 이해하게 됐다.
즉, 합리적인 예측이 얼마나 제한된 시각인지, 왜 인생은 저지르는 자의
것일 수밖에 없는지, 왜 삶은 비선형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고, 우리는
거기에 어떻게―수동적으로 흐름에 몸을 내맡기면서도 능동적으로 노를
저어나감으로서―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는지 등에 대해 내 견해를 깊이
수긍하게 됐다는 말이다. 나는 수업에서나, 1대 1로 대화할 때에나,
나의 오류 가능성을 재삼 강조한다. 내 인식의 한계를 늘 의식하고 살자는
말이다. 그래야 새로운 시각, 새로운 관점,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을 수 있다. 자신이 늘 옳다고 믿는 범생이가 흔히 저지르는, 합리적 예측의
오류와 사고의 경직성에
대해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역사의
시작과 더불어 인간은 합리화를 시작했습니다. 우선 야생의 동식물 대신에
가축이나 재배 식물을 기르기 시작한 겁니다. 합리화는 지나치게 [정보가] 풍요로운
현실로부터 정보량을 배제하여, 인간의 사고와 행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을 울타리로 에워싸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현실 세계의 지나친
풍요로움을 제거하고 계획이나 예측이 가능한 영역을 확대하여, 결국은
그것만을 '세계'로 간주하기에 이르는 전체적인 프로세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 나카자와 신이치,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동아시아, 2001, p.
208.
이
세상은 결코 비좁은 합리적 시각만으로 설명이 안된다. 우리의 제한된 인지
능력은 시공간 속의 무수한 씨줄과 날줄의 얽힘이 빚어내는 오만가지의
가능성을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다. 현실은 '지나치게 풍요로운' 정보로
넘쳐 흐른다. 그 안에서 '전공-취업-성공' 이라는 단 하나의 도식만으로
인생의 성패를 예단하는 것은 너무도 단세포적이며 제한된 '합리'일
따름이다. 무수한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구도자가 성공적인
CEO가 될 수도 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노정의 불확실성을
끌어안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내 주장은 자아와 사회와의 관계를 다루는, 일종의 '외배엽성' 주장에
속한다. 생물학적 개념을 아름답게 이용해서 사물을 설명하는 재주를
가진 나의 한 제자는 '나'라는 존재의 외배엽성과 내배엽성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해준 바 있는데, 어쨌든
어디선가 나의 내배엽성이 시작되고, 그리하여 그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의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나의 외배엽성이 뻗어나가 이루게
되는 현실과의 조응은 실은, 나의 내배엽성의 영역 안에서, 즉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작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사회적, 현세적 성능의 뿌리는 나의 내면에 있다는 말이다.
헌데
나의 내면은, 아니 우리의 내면은 저 외배엽성 외부 세계 못지 않게
복잡하다. 따라서 이 안에도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만연돼있다. 내 안에는 참과 거짓 사이의 무수한 스케일이 자리잡고
있다. 선과 악 사이의 무수한 스케일 또한 병존한다. 미와 추 사이의
무수한 스케일도 그러하다(어쩌면, 진, 선, 미와 같은 척도도 다 외배엽성
인간계의 제한된 시각에 맞추다보니 파생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표현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풀어보자). 이같은 파악 불가능한 무수한
눈금을 지닌 다수의 연속선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나는 자신이 참과 선과 아름다움 쪽으로 조금이라도
더 기울어질 수 있도록 기원할 따름이다. 끝없는 수행만이 그런 기원의
실현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높여준다. 나의 내면의 무수한 연속선들의
가장 중심에는 나의 본질일 마음(心, 성리학적 의미의), 또는 참 나,
또는 자기(Self)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참 나는 비좁은 자아를 뛰어넘어
신적 영역과 맞닿아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참 나가, Self가 나의
구원의 요체다. 참 나가 신으로부터 메시지를 제대로 받아서 전해줄
때 나는 거짓과 악함보다는 참과 선함 쪽으로 좀더 기울어질 수 있다.
그럴 때 외배엽적 차원의 나는 참되게 '잘(good)' 존재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의 내·외배엽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때 나의 현실적 삶도
온전하게 풀려나가게 된다. 이는 유심론적 낙관론이 아니라, 나의 내외면의
조화가 있을 때라야 내가 현세에서 원래 가기로 돼있던 곳으로
제대로 향하게 된다는 말일 따름이다; 그 길에는 가시밭길과 꽃길이
다 포함돼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 길이 맞는 길이다, 궁극의 종착지로
이어지게 되므로. 나의 내외면의 조화는 단호한 선의 추구가 아니라,
선악 사이의 무수한 스케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내적, 외적
불확실성의 수용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시각이 열리고, 마음에
융통성이 생겨야 한다.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끌어안아야 한다.
믿고 몸을 내던져야 한다. 어디에서 그럴 힘이 나오겠는가? 내 짧은
혀로 왈가왈부할 성질의 사안이 아닐 듯 싶다. 단, 내 경우에는, 신의
부르심을 움켜쥔 존재의 도약이 그 힘의 원천을 드러내줬다고만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