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신변잡기 (2011/12/30)
 



© Suk Hoon Han                                                                                                                                                                     
 
 

꿈을 꿨는데, 전에 가까이 지냈던 한 제자가 오랜만에 나를 찾아와서는, 내가 불교 관련 책을 들고 있는 것을 보더니 "선생님은 불교 같은 걸 왜 믿으세요?"라고 물었다. 그 질문을 들은 나는 속으로 매우 답답함을 느꼈는데, 그건 그 제자가 그런 수준의 이해는 이미 극복한 사람일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무지를 안타까워 하며 나는 상세히, 조리있게 설명을 해줬다. '불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어서, 그걸 잘 써서 진리를 볼 수 있으면 되는 거지, 그걸 믿고, 안 믿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달라이 라마도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한 적도 있지 않는냐'라고. 꿈속에서는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는 매우 조리있는 설명이었다―이 설명이 옳든, 그르든 간에. 아마도 내가 잠에서 거의 깨어날 때가 돼다보니 의식의 이성이 작동하기 시작해서 그런 설명이 나왔는가 보다. 무의식의 지하실에서 윗층의 의식의 방으로 빠져나오고 있던 그 순간에 나는 요즘에 읽고 있는 신학자 마커스 보그의 'Putting Away Childish Things'라는 종교 소설의 주인공인 한 진보적인(liberal) 종교학자가 느끼고 있는 세상에 대한 답답함에 공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주인공은 기독교 신화의 스토리를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은유로 간주하고, 스토리 자체보다는 그 스토리들 안에 내재된 사랑이라는 메시지에 집중하는 인물이다. 그는 메시지 보다 신화적 스토리의 글자 하나, 하나를 그대로 믿으려 하는 근본주의자들, 그리고 기독교 자체를 화석화된 고고학적 사료로써만 취급하는 상아탑의 실증주의적 학자들, 양자에 대해 답답함을 느낀다. 잠결에서 빠져나오며 그와 똑같은 답답함을 나도 느끼고 있었다.

요즘 매일 전철 안에서 그 소설을 읽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런 답답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고, 혹은 학기를 마치고 수백 편의 학생들 보고서를 읽다보니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르친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직 머리와 가슴이 굳어버리지 않았기에, 즉, 아직 자연스러운 지성을 보유하고 있기에, 내가 던진 철학적 질문들을 온전히 받아들여 자신의 내면을 헤집어보는 도구로써 잘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보고서를 읽으며 즐거웠다. 그러나 소수의 학생들은 이미 부자연스럽게 의식이 굳어져서, 상투적이고 정형화된 인식의 틀로써만 인간과 세상을 규정짓고 있음도 목격할 수 있었다. 즉, 전통적 인식 방식에 대한 맹종으로 인해 새로운 것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린다든가, 아니면 과학적 실증주의의 경계선 너머에 대한 상상력을 전혀 인정하지 못하는 등의 면이 보였다. 늙어가고 있는 나보다도 더 늙은 마음을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것으로 보여 답답했다.

나는 우리가 성스러운 생명체로서, 주어진 환경과 비합리적일 정도로(in a mysterious way)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며 자신을 키워나가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존재라는 인간관과 교육관을 학생들과 나누고자 매 학기 노력하였고, 이번에도 그런 시도를 했는데, 아무래도 이게 모든 이에게 쉬운 메시지는 아닌가 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앎을 세상과 보다 더 효과적으로 나눌 방도는 없을까? 이게 내 공부의 주된 고민 거리다.

꿈에서 벗어나기 직전에 그 제자는 '믿으면 된다'는 전형적인 근본주의 개신교단의 주장을 내게 들이댔다. 바로 그러한 근본주의적 개신교를 지독히 싫어했던 그가 그런 주장을 하기에 나는 매우 의아했다. 일종의 배신감 같은 미묘한 감정이 스치듯 지나갔다. 잠에서 깨어나며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믿음 한 방으로 해결될 일은 없어. 또, 깨닫는다고 도통하는 게 아니야. 자기실현은 끝없는 길이란다.'

이것이 지천명에 다가가고 있는 내가 인생에 대해 손에 쥐게 된 거의 유일한 '정답'이다. 과거엔 이런 답을 구하기 위해 신앙과 종교계의 모험가들 이야기를 많이 경청했지만, 학생들에게 교육학 강의를 하며 살다보니 이즈음 들어서는 장 자크 루소의 이야기를 다시 곱씹어보게 된다. 지난 학기에 강의 준비하며 '에밀'과 '참회록'의 이곳 저곳을 묵직하게 재독해봤다. 그러다가 다음과 같은 매우 진솔하면서도 의연한 구절에 눈길이 갔다. 삼십대 후반에 읽었을 때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구절이다:

나는 내 반백의 수염을 처녀들의 조롱 섞인 경멸거리가 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불쾌한 포옹이 그녀들을 역겹게 한다든지, 나를 희생하여 그녀들에게 가장 우스꽝스러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든지, 자신들이 비열한 쾌락의 대상이 되었던 것에 복수하기 위해 그녀들이 교활한 늙은이의 그 비열한 쾌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상상한다든지 하는 것 등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제어되지 못한 습관이 예전의 내 욕망을 되살아나게 한다면, 나는 그것을 만족시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치스러운 마음으로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나는 파리의 예쁜 여성의 운명보다 더 끔찍한 운명을 알지 못한다. 그런 여성에 집착하는 한심한 남자의 운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하릴없는 여자처럼 변하여, 그렇게 이중으로 자신에게서 멀어져, 여자를 낚겠다는 허영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보낼 수 있는 가장 우울한 날들을 참으며 보낸다.

- 에밀, pp. 634, 635 (루소 著, 김중현 譯, 한길사, 2003).


이제 내가 '반백'의 '늙은이'에 근접해가고 있다보니 이 구절이 눈에 잘 들어왔던 게다. 나는 루소의 젊은 시절의 '탈선'과 부도덕함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지만, 루소 정도로 늙었으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만큼의 의연함과 자존심을 가진 늙은이로 늙고 싶다. 그가 젊은 시절 저지른 비행과 부덕은 나이 들어 온전히 늙게 된 루소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던 요소들이었다고도 생각한다. 그가 추하게 늙어버리지 않고 윗글에 표현된 바와 같이 의연한 수준에 다다랐다는 것이 내게는 큰 위로다. 그가 윗 글을 썼던 시점이 지금의 나와 똑같은 연배였을 때라서 더더욱 그렇게 느끼기도 한다.

내년에 쓰려고 계획하고 있는 책에서 나는 성욕과 성숙과 성스러움을 다루려 하고 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성(性)과 성(聖)을 한데 담을 수 있을지 조금 두렵긴 하지만, 그러나 죽기 전에 꼭 다뤄보고 싶은 이야기다. 실은, 전술한 보그의 종교소설도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나도 그 소설책이 출간되기 이전부터 이 주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쎅스와 신앙이라... 자칫 잘못하면 JMS와 같은 사악한 잡교의 '선데이 서울'식 이야기로 오인될 수도 있겠지만, 육체와 영혼의 양면성을 논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축에 관한 논의가 아니겠는가. 이미 이백 년도 훨씬 전에 이런 문제를 솔직하게 털어놔준 루소와 같은 대선배가 있기에 나도 그런 도전을 꿈꿀 수 있는 것이겠다.

학기가 다 끝나고 산더미 같은 기말 보고서 채점 일에 하루 종일 파묻혀 있다가 늦은 오후의 석양이 서쪽 산마루에 걸릴 때 쯤에 커피를 한 잔 타마시며 쉬었다. 쉬는 틈에 어린 시절 듣던 음악을 잠시 듣는다. 열두 살 때 함께 뛰놀던 벗이 최근에 보내준 음악 파일이 노트북 안에 가득 들어있다. 사춘기 때 즐겨 듣던 선율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보니, 뜨거운 커피가 몸 안에 퍼지는 것과 같이 소년기의 옛 추억들이 밀려든다. 황금빛 노을에 젖어 그렇게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가만히 있는다. 삶은 기쁨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즐거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걸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아 핏물이 배어나오는 깊숙한 상처가 있는가 하면, 나의 생명력에 활기를 더해주는 기쁨의 자취도 있다.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다. 회한도 없고, 뻐길 것도 없다. 나는 그냥 이 자리에서 이렇게 나만의 꽃을 피우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에 대해 신께 감사한다.

올 한 해, 나를 다 바쳐 삶과 좌충우돌하며 예까지 왔듯이, 내년에도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힘들다고 주저앉지 않을 것이며, 괴롭다고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가는 거다. 그것이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있는 방식이다. 온전한 나, 본래의 나에 가까워질 때, 즉, 자기실현의 노정을 깨어서 걷고 있을 때,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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