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노화 (2012/8/15)
©
Suk Hoon Han
1.
늦은
오후, 동네 길을 걷다가 저 앞에서 걸어가던 노인이 갑자기 푹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하여 달려가봤다. 만취 상태의 좀 뚱뚱한 그 노인은 다행히도
머리를 다치진 않았지만 혼자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육중한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우느라 쩔쩔 매고 있는데 고맙게도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다가와서 도와줬다. 노인은 집이 바로 그 부근이라 했고,
나는 청년과 양쪽에서 노인의 팔짱를 끼고 부축하여 경사진 언덕
길을 올라갔다. 몇 달 전에도 그 언덕배기에서 헤매는 치매 할머니를 거의
안다시피 하여 집 안에 들여놓은 일이 있었다. 갈수록 길에서 헤매는
노인들이 많아지는 건 아닐까. 내 팔에 의지해 가면서 횡설수설하던
노인은 '요즘 젊은이들이 참 문제가 많은데, 자네들 같은 젊은이들을
보니 그렇지도 않다'는 말을 하며 겨우 집 문 안으로 들어가 할머니
앞에서 주저 앉았다. 현관에 조선일보가 눈에 띄었다. 고마워하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오며 속으로, '젊은이들보다 아저씨 같은
노인들이 더 문제요.'라고 중얼거렸다. 그후로도 동네에서 그 노인을
지나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기색이었고,
나도 모르는 척 하고 내 갈 길을 가곤 했다.
심야에 술자리를
파한 뒤 전철로 귀가하던 중, 전철 안에서 노인들 사이에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칠십대로 보이는 그들은 앉을 자리도 많은 빈 열차 안에서
사소한 자리 문제를 갖고 시비를 벌였던 것이다. 난 정의의 사나이도
아니고, 남의 싸움 말리다 괜한 곤욕을 치른 친구들 얘기도 몇 번 들은
터라 멀찌감치 떨어져서 애써 외면하고 가려 했다. 헌데 급기야 시비를
건 공격적인 노인이 상대 노인을 바닥에 쓰러뜨리더니 타고 누르기 시작했고,
운수 사납게도 남자라곤 거의 없던 그 열차 안에서 여자들은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아~ 놔, 증말' 나는 치를 떨며 어쩔 수 없이 공격하고
있는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맘에도 없는 백허그를 하여 그를 일으켜세운
뒤, 발버둥치는 그를 질질 끌어다가 경로석 귀퉁이에 꾹 눌러앉혔다.
그렇게 공격적이던 그 노인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고 내게 백허그를
당하더니 꿈쩍도 못한 채 순순히 제압당하는 것이었다. 헌데 바로 그
틈에 공격을 당했던 노인이 일어나서 뒤쫓아와서는 분이 안풀렸던지
나에게 짓눌려있는 그 노인의 면상을 후려갈기려 했고, 사이에 끼인
나는 그 노인도 밀쳐내느라 곤욕을 치렀다. 다행히도 열차가 멈춰섰고,
그곳은 마침 내가 환승하는 정거장이어서 나는 무작정 한 노인을 끌고
내려 버렸다. 처음 시비를 걸었던 그 노인은 열차에서 내려서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젊은이 앞에서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네'
라며 도망치듯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저씨, 정말 노인들이 문제요~.'
나도 투덜대며 내 갈 길을 갔다. 다행히 옷이 찢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이런
노인들은 악당들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노인들이다. 평범한 노인들이
공동체 구성원들 중에서 많은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에 나오는 자잘한 범죄들은 십대나 젊은이들이 아니라 오십대 이상
노인들이 독점하고 있다. 심한 노인들은 도둑질을 하거나, 이웃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심지어는 어린 소녀를 성폭행한다.
나보다
대단히 많이 나이를 먹지도 않은 그 노인들을 바라보며 나는 습관처럼 고뇌한다.
나도 좀 더 늙어 저런 꼴이 되면 어떡하지? 술 좋아하는 내가 언젠가
대낮에 취해서 길에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전철 칸에서 다른 늙은이와
시비가 벌어져 봉변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을 할 수 있나.
그래도
내가 설마 그런 추태를 벌이지는 않겠지 하는 예상을 한다.
내가 그렇게 예상을 하는 이유는 내가 추태를 벌이는 노인들보다 인간적으로
더 건강하고 성숙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아마도 그들보다 더 좋은
사회경제적 기회 속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양호한 직업생활을 누리며
살아왔을 것이라는 환경적인 조건에 대한 추정과 더 관련이 많다. 즉,
겉으로 그럴 듯한 학자, 교육자의 모습과 조건을 제외하고 볼 때, 기본적으로
고통스럽게 노화하고 있는 그 노인들과 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란 말이다. 노화가 고통이고 퇴화라면, 인생이란 희망이 없는 침울한 노정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나.
2.
지난 학기에는 어쩌다 보니
대학의 새내기들을 상대로 대규모 강의를 맡았었다. 성인이 된 인간의
성장에 관해 논하던 중, 귀여운 학생들에게 내가 물었다.
"여러분,
그 힘든 고3 수험생 시절 다 마치고 바라던 대로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이제 스트레스가 많이 줄었나요?"
"(이구동성으로
힘차게) 아니요~!"
"아니, 그렇게 바라던 대학생이 됐는데도
스트레스가 더 많다는 말이예요?"
"네~!"
"그럼,
대학을 졸업하면 그땐 스트레스가 줄어들까요?"
"아니요~!
취직해야 하잖아요!"
"허허, 그럼, 취직하고 나면 스트레스가
줄어들까요?"
"아니요~! 돈벌어야 하잖아요!"
"그럼,
돈벌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면 스트레스가 줄어들까요?"
"아니요~!
더, 더 힘들어져요!"
"아니, 그럼 여러분은 대체
왜 살아요?"
마지막 나의 질문에 학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자신들도 뭣 때문에 이렇게 스트레스 속에서 바둥대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는
의미일 테고, 그러면서도 변함없이 스트레스 받으며 계속 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우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삶은 쉬워지지 않고 어려워지고, 스트레스는 갈수록 더 쌓여만 간다면,
그런 삶의 귀결인 노인의 심신이 피폐하고 황폐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 아닐까?
그러니, 삶이 날이 갈수록 쌓여만 가는 스트레스를
버텨내야 하는 지옥의 격전장이 아니라, 날이 갈수록 나를 키워가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성장의 터전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그리 할 수가 있을까? 그에 대한 내 고민과 해답 찾기의 과정을 나의
세 번째 책에서 다룰 예정이다.
지금은 쉬운 해답 한 가지만
제시해보겠다. 그건, 본보기를
갖는 것이다.
건강하고 성숙하게 잘 늙은 본보기를 찾아내는 것이란 말이다. 이건
쉬울까? 결코 쉽지 않다. 이 사회의 엘리트들을 많이 봐온 나로서도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적지 않은 엘리트들이 늙어서 불평불만과
분노와 증오를 품은 채 살아가고 있음을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보기, 귀감이 될 훌륭한 노인을 찾는 일은 어렵고, 어렵지만 가치가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나보다 이십 년 연상이신 노학자 한 분을
안다.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또 가정을 꾸리는 데에도―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성공한 분인데, 여타 엘리트 노인들과는 달리
권위의식도 없고, 격식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젊은이들을 스스럼없고
자연스레 대하시는 분이다. 아직도 젊은 학인이 그분을 찾아가 엎드려
절하며 스승으로 모시고 예를 다 한다. 나는 그분을 하나의 본보기로
삼았다. 그런 분들을 더 많이 찾아낼 생각이다. 내가 희망을 갖고, 내
학생들이 희망을 갖도록 돕기 위해서.
이십 년 뒤의 나를 한
번 매우 긍정적으로 상상해본다. 내가 제대로 건강하게 성숙하여 노인이
됐다면 나는 그 존경스러운 노학자의 태도를 본따,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난 매우 부끄럽고 흠 투성이인 인간입니다. 선생으로
불릴 자격도 없는 주제에 뻔뻔스럽게도 선생 노릇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선생질 한 덕분에 어여쁜 제자님들을 많이도 만났고, 나는 그래서
행복합니다."
인간은 평생 생산적 활동을 영위하다
노화에 이르게 될 때, 어떤 분야에서든 후대를
돌보고 키우는 일에
헌신할 수 있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노화를 위한 최상의 기회를
잡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게 됐다.
늙으면 정치와 경제의 실무는
젊은 세대에게 맡기는 게 자연의 순리 아니겠는가. 늙은이는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말을 보다 품위있게 해야 할 것 같다: 원로들께서는 세상사(世上事)는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뒷전으로 점잖게 물러나서 연륜과 지혜로
후대를 키우시라고. 아, 물론 후대를 키울 연륜과 지혜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젊어서부터 (자기실현을 지향하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3.
후대를
키우는 일에는 보너스도 주어진다. 얼마 전에 프로이트와 융 간의 관계를
소재로 한 'A Dangerous Method'라는 영화를 아주 재밌게 봤다.
헌데 주변에 그 영화를 본 이도 없고, 내용도 단순치가 않아 누군가와
그 영화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그럴 상대가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런데 참으로 반갑게도 해외 유학중인 옛 제자가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마침 그도 그 영화를 인상깊게 봤다 하여
여러 시간 맥줏잔을 기울이며 담소할 수 있었다. 제자는 내 영향 때문인지
융의 분석심리학 책도 계속 읽고 있다고 했고, 그래서 대화는 풍성하고도
즐거웠다. 이런 복락은 선생에게만
주어지는 특혜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