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201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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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수업이
없는 날 아침, 일상적 잡무를 마치고 집 앞의 청계산 자락에 올랐다.
날이 갑자기 차가워져서 반팔 셔츠 위에 두툼한 외투를 입었다. 여느
때처럼 빠른 걸음으로 오르막길을 올랐고, 이따금씩 뛰기도 했다. 산길의
오르막에서는 조그만 달려도 숨이 턱에 차오른다. 좀 격렬하게 몸을
움직여줘야 기운도 나고 투지도 생겨 힘든 일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요즘은 매일 밤 1시쯤까지 일하고 공부하다 잔다. 좀 지겨우면 맥주를
마시면서 공부하기도 한다. 공부할 건 갈수록 많아지는 것 같다. 그게
난 즐겁다. 고등학생 때 이렇게 했으면 서울대 갔을 텐데. 암튼 일이
많고 잡무도 늘다보니 똑똑한 비서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 월급을 줄 수 있다면 비서 겸 조교를 한
명 채용했을 텐데. 그럴 형편은 못되니, 아내가 시험 답안 채점도 해주고,
둘째 딸이 수업 용 파워포인트 문서도 만들어준다. 어쩌면 조만간 학생들
중에서 단기간 알바생 조교 한 명이라도 모집해야 할지 모르겠다.
산길을
오르다 간밤의 꿈이 떠올랐다. 어떤 호텔에 특강을 하러 갔는데, 청중의
요청도 있고 하여 강의의 반은 쉬고 놀았다. 강의가 끝나 호텔을 나서려
하는데 내 구두를 메이드가 닦아놓고는 제 자리에 돌려다놓지 않아서
구두를 찾아나섰다. 한참을 구두를 못찾아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친구
J가 호텔 방(온돌) 하나를 잡아놓고 아예 자고 갈 생각으로 이불과 요를
깔아놨다. 난 구두 찾기를 그만 두고 그냥 하루 자고 가야 하나 생각했다.
왜
청중은 강의를 조금만 하기를 바랬을까? 평소 대학생들 대상으로 많은
컨텐츠를 전해주려 했던 내 욕구를 자제하라는 신호일지 모르겠다. 그
청중은 일반 사회인들이었고, 그들에게는 다량의 정보보다는 의미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더 유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차츰 일반인 대상의
강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는 현 처지에 대해 내면의 자기가 넌지시 조언을
해준 걸까?
내 구두를 가져간 메이드는 아무래도 나의 아니마(무의식의
여성성, 깊은 자기의 메신저)였던 것 같다. 꿈에 아니마가 나타날 때마다
느꼈던 차갑고 절제된 관심을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구두는
보통 사회성, 사회적 규범, 페르조나를 상징하는 것 같다. 아니마는
왜 구두를 감췄을까?(메이드가 구두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일부러 안
갖다주고 있는 것 같다는 심증이 있었다.) 사회적인 체면치레에 너무
신경쓰지 말라는 메시지일까? 친구 J는 내 안의 단호한 개인주의를 상징하는
것 같다. 친구가 구두 찾기를 그만 두고 방에서 묵고 가자고 제안했던
것은 사회성 쪽에 대한 신경쓰기를 그만 접고 내 안의 고유한 개인적
영역으로 돌아와 자신을 돌아보라는 메시지인 것도 같다. 그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이즈음 들어 내가 이런 저런 전과 다른 다양한 일들을 맡게
됨에 따라 이전에 홀대했던 사회적 관계를 새로이 잘 돌봐야 할 필요성이
생겨서, 예전에는 늘 되돌아가곤 했던 나만의 정신적 공간을 오랫동안
멀리 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산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새삼스레 지금까지의 나 자신과는 다르게, 사람들 챙기고, 네트워크 관리하고,
인간관계에 윤활유 치는 일을 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관계의 중요성을
오십에 이르러 새삼 깨달았다면, 관계에 기여하는 방식도 나의 원래
스타일대로 해나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떤 이가 내 이익에 영향력을
끼칠 위치에 있다 하여 갑자기 그에게 곰살맞게 구는 건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는 칸트의 명령에도 위배된다.
한마디로, '나'가 아닌 방식으로 타인을 대한다는 건 진정성이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원래의 나 자신과 다르게, 괜히
'영업'하고 '인사'하는 일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내 본연의
생겨먹은 꼴로 돌아와 내 일을 충실히 할 것이며, 그러다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아도 될 계제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 인간적으로 진솔하고도
자연스럽게 '인사'도 하고 하는 편이 낫다고 결론내리게 됐다. 만약에
지금 내가 '영업'과 '인사'를 하지 않아 현실적 불이익이 내게 돌아온다면,
그건 하늘의 뜻이니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따름이다. Be myself.
오늘도
연구실에서 나 홀로 공부하며 지낼 것이다. 이게 내게는 꼭 필요하다.
그래야 바깥으로 나갈 힘이 비축되므로. 내 생긴 꼴대로 생활하기 위하여
밀린 수행일상도 이렇게 써본다. 할 일이 산적해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깨어있는 의식으로 볼 수 있어야 나의 나머지
일들도 제대로 할 수 있다.
그건 그런데, 삶의 전개 속에서 사람들
사이의 인연이란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오만가지 조합의 방식으로 맞물려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즈음 다시금 여러 번
실감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 현명한 이라면 어떤 관계에서도 선한 언행만
남기려 할 것이다. 나는 뚜렷이 악한 언행을 남긴 관계들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충분히 신경 써주거나 정성을 들이지 못하고 홀대한 관계들은 여럿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런 관계들이 세월이 흘러 다시 삶의 수면으로
떠오르고, 그래서 나를 당황스럽고 부끄럽게도 만든다. 동시에 내게
파괴적이거나 사악한 언행의 자취를 남겼던 이들이 떠오른다. 문득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 은행나무를 바라보니, 그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솟아오른다. 그들 중에서도, 아직 철이 안들어 내게 그런 짓을
했었을 어린 제자가 제일 가엾다.
수업 시간에 리더십의 요체는
진심, 진정성이라는 말을 학생들에게 했다. 나로선, 인간관계 네트워크의
유지를 위해 윤활유를 바르는 것이 진정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물론
진정으로 그리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들과는 스타일이 다르다. 나의 진정성은 나만의 것 안으로 들어가는
일에 몰입하는 데 있다. 그것이 편향된 태도임을 잘 알지만, 그게 내가
생겨먹은 꼴이라고 오십 년을 살아오며 알 수 있게 됐다. 따라서 나의
자기실현이란 완벽한 인격을 갖춘 이가 되는 게 아니다. 편향된 성향이나
태도를 가진 이로서 성숙해지는 것도 나의 자기실현이다. 단, 성숙할수록
자신의 편향됨이 유발시킨 부덕함에 대해 뉘우치게 되는데, 진심으로
뉘우칠 때에라야 타인에 대한 태도 속에 나의 진정성이 담기게 되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