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선생 (2012/9/23)
©
Suk Hoon Han
1.
K교수님은
살짝 흥분된 상태로 보였다. 은퇴한 노학자, 늘 점잖고 친절하며 근면성실하게
살아오신 K교수님. 한참 후배인 나와 교수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됐는데, 그 대학에 교수로 갓 부임한 당신의 제자를 소개시켜주겠다
하셨다. 젊은 여교수인 그 제자가 얼마나 똑똑하고 예쁘며 당신을 잘
따랐었는지 수다스럽게 자랑하고 계셨다. 정말 내게 그 제자를 자랑하고
싶으셨나 보다. 그래서 K교수님과 나는 식탁을 마주 하고 앉아 주문을
미룬 채 그 젊은 여교수를 기다렸다.
나는 원로 교수님과의 식사여서
약속 시각인 12시보다 5분쯤 일찍 도착했는데, K교수님께선 나보다도
먼저 와계셨다. 그렇게 둘이 마주 앉은 채로 시간이 흘렀다, 5분, 그리고
10분이 지나자 K교수님은 조금씩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하셨다. 자신의 제자가
약속 시간에 늦는 데 대해 내게 미안해하시는 것을 눈치 챈 나는 일부러
화제를 딴 곳으로 돌리며 쾌활한 척 이야기했다. 그러나 K교수님의 노심초사는
명백했다. 그런 불편한 기다림 끝에 20여분이 지나서야 그 젊은 여교수가
도착했다. K교수께서는 일말의 불쾌함도 드러내지 않으신 채 젊은 제자를
맞이하며 반갑게 웃으셨고, 자랑스러운 교수 제자를 내게 소개해주시며
그녀 대신 미안해 하셨다. 나는 자리가 어색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더더욱
쾌활한 척 내 소개를 하고 그 여교수와도 이야기를 나눴다―나보다도,
스승이신 K교수께 여교수가 적절한 사과를 하기를 기대하며.
식사가
나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가 오갔다―여교수는 사과하지 않았지만.
K교수님께서는 매우 즐거워하셨고, 난 즐거워 하는 척 했는데, 여교수는
그다지 즐거운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나는 '내가 왜 이런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노교수께서는 당신의 자랑스러운
제자를 꼭 소개해주고 싶을 정도로 나를 존귀하게 대해주시는 분 아닌가. 하여,
그렇게 한 삼십 분 식사를 하던
중, 여교수는 스승께 중요한 약속이 1시에 잡혀서 오래 이야기를 못
나누고 가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K교수님의 얼굴엔 서운한 빛이
감돌았지만, 교수님과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럼 가보시라며 여교수를 보냈다.
옛 스승께서 모처럼 불렀는데, 제자는 약속에 늦게 와서 잠간 앉았다가 바쁘게
가버렸다.
글세... 사람마다 일의 우선 순위가 다른 것이 당연하겠으나...
나는 내게 돈이라든가 학문적 실적 등과 같은 현실적 이익을 줄 일보다도
사람을 대하는 일에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신조 같은 걸 갖고 있다(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동의하게 된
이래로). 아마도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는 못하는가 보다.
아무튼, 이를테면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제자에게 상담해주느라
반나절을 쏟는 것이 내 일할 시간 챙기는 것보다 훨씬 ―영적으로―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여교수의 스승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는, 나와는 인생관이 다른 부류의 인간인가 보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이 놀지 말아야지...)
여교수가 서둘러 떠난 뒤, K교수님은 입을 닫으셨고, 나는 좀 뻘쭘해졌다. 일부러
기분 전환하는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글세, 그렇게 아끼고
자랑스러워 했던 제자에게 귀찮은 노인네 취급을 받았다고 느끼셨던
것일까... 은퇴하고, 더 이상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쓸모없는 옛
선생...
천천히 차를 마시며, K교수께서는 나와 일상적인 대화를 약간 나누신
후 작별하셨는데, 그분의 구부정한 어깨 위에 쓸쓸함이 짙게 배어있음을
볼 수 있었다. 난 냉정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흠... 사제지간이란 거, 결국
내리
사랑이로구만.'
2.
초대받아 찾아간 모임에서
뵌 그 귀부인께서는 이 나라의 내로라 하는 집안의 안주인이셨다. 나보다
훌쩍 위인 연령에도 불구하고 소시적의 출중한 외모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는 풍모와 기품을 간직하고 있는 분이었다. 그러나 조금도 거만하거나
어려워보이지 않아 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헌데 좌중의 한 나이 많은
교수분과 대화하던 중, 귀부인의 옛 스승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교수의 전언에 의하면 그 옛 스승은 이미 작고하신지 꽤 됐다는 것이다.
그 말이 나온 순간, 내 맞은 편 쯤에 앉아있던 귀부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으로
탄식의 외마디를 뱉어냈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대화 매너와는 다르게 충격을 받은 눈빛으로 홀로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를 딸처럼 아끼셨던 선생님이셨는데... 내가 아무리 바빠서
못 찾아뵈도 어쩌다 뵙게 되면, '네가 아무리 그래도, 넌 내 딸이야'라며 반겨주셨던 분인데..
몇 년 안부를 못 여쭸는데 그 새 돌아가셨다니...' 그녀는 주변의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지 않은 음성으로 넋나간 듯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모임의 남은 시간 내내 귀부인은 이전과 달리 기운이
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난 냉정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흠... 사제지간이란 거, 내리 사랑이로구만. 근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가봐.'
3.
'선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건방진 제목의 책을 세상에 내놓고 나서 떠오른 최근의
경험들에 관해 끄적여봤다. 책에선 잘난 소리만 잔뜩 떠벌려놨지만, 위의 늙은 선생들을 생각해보면 슬퍼지기도
한다. 허나 위의 그 젊은 여교수를 비인간적인 속물, 자신의 스승을 유용성이 있을 때에만
'써먹은' 그런 속물일 것으로 속단한다는 건 말도 안될 뿐더러(비록
그런 유형의 인간들의 전형적 스타일을 충분히 내게 보여줬다고 느끼긴
했지만), 사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승의 사랑을 받고도
그냥 그렇게 대충 넘어가 버리곤 하지 않았는가. 뭐, 특별한 일들도
아니다.
그렇긴 해도, 사실 난 코믹 애니메이션 '쿵푸팬더' 1편
따위도 불쌍한 스승이 나오기 때문에, 보다 보면 가슴이 아파 다시 보기를
싫어한다. 지난 한 해 동안 선생들 편에 서서 책을 쓰느라 너무 선생
편향적으로 선생에게 감정이입이 돼버렸는가 보다.
선생질은 이 세상을 위한 대단히 중요한 소명이라고
나는 믿지만,
그런 위대한 일에도 슬픔은 따라오는 법. 언젠가 시인 고은이 슬픔은 세상의
본질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선생질은 세상의 본질에 다가가는
길인가 보다. 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