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회수 (2012/9/9)
 

© Suk Hoon Han                                                                                                                                                                        
 
 

지난 수년간 독학해온 나의 수행법 하나를 소개한다. '융(C.G. Jung) 분석심리학적 자기성찰 수행법'이라고나 할까. 심리학 이론을 수행 방법으로 삼는 것에 대해 한국 분석심리학의 태두 이부영 교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개인에 따라, 처하고 있는 의식상황에 따라, 또한 자기성찰의 경과와 관계에 따라 무의식은 의식의 태도를 세심하게 보상해나간다. 사랑의 문제, 아니마[남성 안의 여성성], 아니무스[여성 안의 남성성]에 얽힌 문제를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분석과정은 규격화된 어떤 수행과정보다도 개성적인 섬세한 작업이다." - 그림자: 우리 마음 속의 어두운 반려자, p. 207.

여기서 무의식이 의식의 태도를 보상한다는 것은, 제한되고 비좁은 의식으로 하여금 확장된 자기관(觀)을 수용하도록 무의식이 부추기거나 이끌어준다는 말이다.

"내 속에 있는 낯선 타자를 인정하는 것, 즉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다르게 하고 싶은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 그림자, pp. 209-210.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나는 내 그림자를 살리고, 그래서 회수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는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른지 여러 해가 지났다. 그림자란 내 안의 억압되거나 홀대받거나 부정된 심리적 경향, 특징들이 나의 무의식 속에 숨어서 열등한 인격, 또는 콤플렉스로 자리잡고 있는 양상을 뜻한다. 이 콤플렉스들은 내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나에 의해 부정됐기 때문에 무의식에 숨어있다가 동일한 성질을 보이는 경향을 타인에게서 포착할 때, 그 타인에게 투사(projection)된다고 한다. 그래서 괜히 타인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어두운 경향들이 타인 것이 아니라 내 것임을 이해하여, 이것들이 내 안에서 살아나도록 생명을 불어넣어줘야 한다. 그래야 쓸데없이 남 탓 안하고 진정으로 온전한 자신을 볼 수 있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어둠을 극복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림자를 회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짓거리들이다.

좀 적나라한 까발리기다.


1. 내가 혐오한 타자들(투사 대상)은 누구이고, 그들에게 나의 어떤 그림자가 투사됐으며, 그 그림자의 원천인 내가 숨기고 싶었던 유치한 경향들은 무엇인지 알아내기

아래 표의 '투사 대상'은 내가 평소에 혐오하는 부류의 인간들이다. '내 그림자'란 그 투사 대상에게 투사된 내 안의 어두운 경향을 뜻한다. '그림자의 뿌리'는 내 그림자를 형성한 근원이 된 사건이나 정황, 그리고 그 사건과 연관된 유치한 감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아래의 그림자 분석과 뿌리에 대한 추정은 결코 절대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오류와 오인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아직 나를 온전히 잘 알지 못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속에 축적된 자아성찰의 결과물인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나는 유아기에 엄마와 분리되는 걸 두려워 한 유치한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자라면서 이 감정을 인정하고 수용해주지 못하니까―'남자란 씩씩해야 돼!'라는 양육 문화로 인해― 이 감정이 깃든 경향이 무의식 속에 그림자로 자리잡게 됐고, 그 그림자는 특히 시간과 약속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는―그래야 엄마를 놓치지 않으므로― 나의 성향을 부지불식간에 배태했으며, 바로 그런 성향을 보여주는, 지나치게 원칙주의적이며 규정을 중시하는 관료집단에게 내 안의 그림자가 투사됐다는 말이다. 즉, 내 안에 숨어있는 관료주의자적 그림자 때문에 관료주의자를 싫어한다는 말이다.

위의 표에 있는 것 못지않게  심각한 그림자들이 내겐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호전성이 없고 남에게 쉽게 양보하는 소심함을 어려선 수치스럽게 여겨 그에 대해 열등의식을 품었으나, 그것은 더 이상 그림자 투사를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성인이 된 이후의 성숙과정에서 그 그림자들이 많이 회수된 것 같다는 말이다. 이젠 남들에게(특히 매력적인 여성들에게도) 나 자신을 '여성적'이고 섬세하다고도 스스로 말할 수 있고, 자신을 소심한 '새가슴'이라고도 표현하며, 얻어 맞을까봐 겁나서 불량배들을 보면 피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의식화에 꽤 성공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는 장성한 뒤, 공격적이고 쎄보이는 남자들과의 대결 상황에서 꿀리지 않았던 몇 번의 운좋은 경험들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또, 워낙 내향적인 나는 내면에 짙은 외향성의 그림자도 지니고 있었을 터인데, 내향성의 그림자인 외향성을 살려주는 데는 크게 성공한 것 같다, 특히 강의하며 떠벌리기, 술자리에서 깊은 대화하기, 그밖에도 제자들이나 길벗들과 담소하기 등을 통하여 숨은 외향성을 살려준 것 같다. 덧붙여서, 성격상 사고형인 나는 감정적 측면이 미발달했는데, 이처럼 열등한 감정의 그림자를 살려주기 위해서는 조금씩 분노 등의 부정적 감정을 표출하는 것 등이 유용한 방법이라고 한다. 아마 이것도 그간 좀 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 이런 그림자, 즉 부정적 경향들을 회수한다는 것, 내게 도로 거둬들인다는 것은?: 그 경향들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말하고, 실천하고, 갖고 논다는 것.

융의 권고는 이러하다:

"그림자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울 것"

부정적이고 열등한 "욕구가 자기의 무의식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 욕구를 살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예컨대 '괜히', '무의식적으로' 관료주의자들을 혐오하기를 그만 두고 그들을 품고 이해하며 그들과 공존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투사된 내 그림자를 도로 가져와야 한다. (물론 그 아래의 예인 성폭력자들에게 투사된 그림자를 회수함으로써 그들의 악행을 수용하고 이해해줘야 한다는 단순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들을 엄정하게 징벌하고 그들로부터 사회를 제대로 보호하기 위해서도 성폭력자들에게 내 그림자를 투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위의 표에 이어 아래의 표는 나의 부정적 경향이 투사된 대상으로부터 그 경향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내가 실제로 이행해왔거나 앞으로 이행해야 하는 행동을 나타낸다.

좀 적나라한 까발리기였다. 굳이 그러는 이유는? 세상의 평판보다는 진실된 삶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 안의 신과 연결된 통로는 세상에 아부하기보다는 나에게 솔직해질 때 더 시원하게 뚫린다는 걸 알기 때문에.

뭐, 이런 걸 읽고 나를 나쁜 놈으로 보든 어쩌든, 그건 아무 상관 없다. 아마 나의 스승님들, 길벗님들과 나의 성숙한 제자들은 이런 나를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해줄 것이다―또는 적극 동조해주거나. 물론, 아직 나의 어린 제자들과 딸들에게는 설명해주기 불가능한 것들이지만.

대통령이나 장관 될 이들은 이런 온전한 자기를 드러낼 수가 없겠지? 부도덕하고 위선적이라고 욕먹을 테니까. 페르조나의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운명이 참으로 불쌍하다.

'수행일상 2012'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