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자기인식(1) (2012/2/24)
©
Suk Hoon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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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쓰고 있는 '선생론' 책의 원고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오늘
날 우리 교육이 직면하고 있는 열악한 현실적 여건을 볼 때 높은 역량을
갖춘 선생들이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우리의 선생들은 그 역량 중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인성을 함양할 충분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부족한
인성적 역량으로는 어려운 교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고, 그렇게
될 경우 학생뿐 아니라 교사 자신도 만족한 삶을 영위하기 어려우니
그 역량을 키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도 건전한 대응책이 되겠다.
그런데 인성이란, 세상의 가벼운 풍문의 센서인 나의 의식의 표피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의식 저 깊숙한 곳에서 길어 올려야 할
묵직한 나의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깊은 곳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알아야 한다. 자기인식이 필요하다.
문제는 현대인인 우리가 자기인식과 친숙하지 않다는 데 있다. 아니, ‘나를 안다’는 것은 어쩌면 현대인에게 가장 황당한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볼 수가 없다―거울에 비친 겉모습 밖에는. 나는 언제나 인식의 주체였을 뿐, ‘나’ 자신을 인식의 객체로 삼아본 적이 없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현대가 도래하기 이전의 전근대인들이 어떻게 자기인식에 이르게 됐는지에 관해 심오한 설명을 제공해준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청소년들은 자신의 공동체의 전래 신화를 깊이 이해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이 지녀야 할 역량과 의식을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성인이 됐을 때 공동체 내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맡아서 타고난 역량을 최대한도로 발휘할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험난해서 가혹한 통과의례가 부과되기도 한다.
캠벨이 지적하는 바는, 이러한 전근대의 청소년에 비해 현대의 청소년들은 공동체 내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각도 없고, 자신이 무슨 일을 맡아서, 왜 해야 할지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공동체의 신화 자체가 망각되기도 했고. 쉽게 말해 뭘 하고 살다 가야 할지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와 부모가 제공하는 과보호 속에서 뜻도, 의욕도 없이 몸만 어른으로 성장해서, 제도와 시스템 속에서 연명해가게 되지만, 그러한 현대인의 삶에는 팔팔한 생명력이 결여됐기 때문에, 결국엔 고사(枯死) 상태에 빠져 의미 없는 여생을 보내다 가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저 먹고 살다가 죽는다는 말이다.
‘나는 그렇게 먹고 살다가 죽고 싶지 않다. 십대는 대학입학의 준비 단계, 이십대는 직장생활의 준비 단계, 삼십대는 가족부양의 준비 단계, 사십대는 노후생활의 준비 단계여야 하는 다수 한국인의 삶을 그대로 따르기 싫다. 나는 더 이상 미래를 준비하며 현재를 희생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고 싶다.’ 이것이 심층 심리학에서 볼 때 인생의 중대 전환기인 중년의 도입부에서 내가 감히 결정한 바였다.
이렇게 만용을 부려 ‘현실’을 거부하다보니, 노후보장은커녕 가족부양 단계에서도 허덕이게 되긴 했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의 매일, 매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꽃 피우기 위해 신나게, 열심히 산다. 지천명에 다다른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 하는 것들을 더욱 꽃피우려고 버둥댄다. 나는 여전히 나를 더 잘 알기 위해서 별의 별 발악을 해댄다. 그래서 난 팔팔하게 살아있음을 매일 느끼며 산다.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의 나의 역할을 나 스스로 결정하고,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런 나의 삶은 의미로 꽉 차있다. 내 역할이란 선생이다. 금전적 보상과 사회적 인정을 넘어서는, 우리의 공동체의 유지와 개선을 위해 신나게 자신을 써먹는 역할의 주체로서 나 자신을 규정했다. 나는 이런 자기인식에 도달했기에 내 일에 충실하고,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래서 행복한 선생이다.
선생으로서의 자신의 역량을 키우려면 깊은 자기인식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무한대로 복잡한 존재인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선생의 일이라는 것은 지식 너머의 깊은 마음을 필요로 한다. 예컨대 학생과의 의사소통이라는 선생의 중대 과제가 단순히 말솜씨만으로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타인의 마음에 대한 예민하고도 애정이 담긴 이해력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깊은 마음, 또는 인성적 측면의 실질적 필요성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예컨대 수없이 다양한 문제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만들어가고, 어린 학생들의 배움을 돕는 보다 아름다운 방식을 고안해내기 위하여 필요한 창의력은 단순 훈련 과정 따위로 키워낼 수 있는 역량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깊은 마음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은 마음의 힘을 내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의 전체의 힘을 구동시켜야 한다. 깊은 마음의 힘이 내 두뇌에서만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내 머리와 몸과 가슴과 영혼이 다 힘을 보태줘야 할 것이다. 그 힘을 끌어낼 원천인 나라는 존재의 깊숙한 내면과 드넓은 외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자기인식이 최우선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