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2

선생, 자기인식(2) (2012/3/6)

* 요즘 쓰고 있는 '선생론' 책의 원고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나는 서른 살이 넘을 때까지도 ‘자기인식’이란 개념 자체가 희박했었다. 서른이 넘어 박사 과정에 지원하기 위해서 자기소개서를 쓸 때에, ‘공부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라고 그럴싸하게 썼지만, 실제로 그 말을 이해하고 있지도 못했다. 그저 멋있어보여서 누군가의 표현을 베꼈을 뿐이다. 그렇다, 나의 삶은 남의 삶을 베껴가는 과정이었다. 남들이 멋있다고 하는 기준들에 맞춰서 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박학다식, 지성인, 서구화된 도시적 세련미 등등이라는 기준에 맞춰서... 비록 내가 돈과 명예, 또는 외양 따위에 과도하게 치중하는 성향은 아니었다고 믿지만, 대체로 세상이 중시하는 바를 기준으로 나의 미래를 획책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어른이 돼서 맞닥뜨리게 된 건 내적 공허함이었다. 진짜로 내 삶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잘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그런 공허감은 미국의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순간에 절정을 이뤘다. 나의 사회적, 지적 허영심이 완전히 충족되는 그 순간에 역설적으로 나는 내가 좇던 것들이 내용 없이 텅 빈 거품 같은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작 이런 거였어?’ 너무도 오랫동안 진짜가 아닌 가짜를 좇아왔음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학위 받고 귀국한 이후, 중년에 즈음해서는 그간 소외됐던 진짜 나, 오리지널 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짜 나의 실현, 즉 자기실현을 꿈꾸게 됐다. 그렇게 예까지 오다보니, 나는 내 학생들이 궁극적으로 내면의 참된 자기를 찾아낼 것을 권고하는 선생이 돼버렸다.

이번 학기가 다 끝나고 나서, 나의 ‘교육철학 및 교육사’ 수업을 들은 3개 학교 약 200 명의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쪽지 메일을 보냈다:

숨차게 기말을 향해 달려오던 학기 종반에 실은, 한 가지 토의를 여러분과 해보려 했었는데, 진도를 맞추느라 타이밍을 놓쳐버렸네요. 그건 이른바 '이상주의적' 교육사상에 터해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또는 성공 가능성이 있을까 하는 문제에 관한 토의였습니다. 성리학이나 루소, 또는 듀이 사상의 정수에 따라 교육받고 자라난 이, 예컨대 '유진의 학교'에 나오는 안동의 성리학자 송주황의 딸들 같은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과거의 경험에 비춰볼 때, 대체로 여러분과 같은 서울의 '명문' 대학의 학생들 중에는 그들의 생존 가능성이 낮다고 응답하는 이들이 다수였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남한산초등학교의 사례가 담긴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니 응답이 달라지더군요. 남한산초는 대안적인 전인교육 프로그램을 전적으로 실천하여 전국의 이목을 끈 유명한 케이스입니다. (이번 학기에는 그 영상을 볼 시간을 확보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곳의 어린이들은 자연친화적 환경에서 자신의 흥미와 관심, 즉 개성이 존중받는 교육을 받고 열심히 뛰어놀며 학원도 안 다니는데, 결국 중고등학교 과정에도 잘 적응하고, 건강하게 자신들의 길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죠.

나는 이상주의적 교육이 꿈같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어려서 전인교육, 인성교육을 잘 받고 일찌감치 자신을 잘 이해하며 자라난 청소년들은 그런 이상주의적 경험 때문에 현실에 적응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으로 튼튼하고 전인적으로 고루 성숙하였기 때문에(에밀처럼) 현실의 도전을 더 힘차고 긍정적으로 받아내고 극복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건 대안적 교육을 받고 대학에 진학한 실제의 학생들이 스스로 토로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상주의적 대안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모두 현실에 잘 적응하거나 현실을 잘 극복하는 건 아니겠죠. 또 중고등학생 시절에 전인교육에 치중했던 학생이 예를 들어 서울법대에 진학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런 교육을 받은 적지 않은 학생들은 이미 십대에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자신에게 잘 맞는 길을 의욕적으로(!) 찾아 나서게 되며, 따라서 매우 힘차고 건강하게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인생의 성패의 조건에 대한 고정관념을 품고 있다면, 그에 대해 철학적으로 회의해봄이 어떨까 싶습니다.

소크라테스 싸부님 말씀 마따나, '평탄한 삶은 인간에게 적합한 삶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험로에서 우리의 근육을 더 키울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편안하고 안전하려고 태어났을까요, 아님 험로를 극복하여 더 완전해지기 위해서 태어났을까요? 답은 자기가 정하는 거죠.

내가 보기에 요즘의 대학생들은 예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내면의 참된 자기를 찾는다는 말의 개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나보다도 더 타인의 기대에 맞춰 자신의 삶을 기획해온 것 같다. 타인들이 없으면 나도 없다. 그러나 내가 있어야 타인들과도 진짜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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