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상처입을 자유 (2012/11/18)

내가 존경하는 한 교수님은 젊은 제자들을 온전한 성인이자 '프로'로 키우는 과정에서 그들의 영혼에 "기스(일본어 잔재)를 내는" 이른바 '상처론'을 견지한다. 좀 터프한(영어 잔재) 양육방식과 유사한 이 이론은 학생의 정신을 자극하여 자각에 이르게 함을 목표로 삼는 바, 내 보기엔 웬만큼 자기 확신이 서있지 않은 교육자로서는 실천할 수 없는 교수 이론이다. 헌데 이 교수님의 '상처론'은 몇몇 교육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던 바, 교육학자들은 학습자에게 자극을 가하고 상처를 입히는 작업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며, 칭찬과 같은 긍정적 보강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양쪽 다 맞는 말이 아닐까 싶다. 어느 한 쪽이 절대적 답이 될 수는 없다. 선생과 학생 간의 역학 관계는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개성도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다. 또한 학생의 개성도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다. 하나의 이론에 인간의 다양성을 다 담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따라서 교수자나 학생의 행동을 '올바른' 틀 안에 집어넣으려는 시도는 이런 무한한 다양성을 고사시킬 위험 소지를 안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상처가 더 좋은 성과를 가져다주고, 또 어떤 경우에는 칭찬이 그러할 것이다. 중요한 건 매 순간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결정하는 주체인 교수자가 항상 정신차리고 자신의 최상을 유지하는 것이리라. 행동(do)보다는 존재(be)다.

아무튼 요즘 젊은이들을 칭찬하고 보듬어주고 위로해주자는 이야기가 많다. '힐링'이 대세가 된 시대, 내 책 표지에도 출판사에서 '힐링 에세이'라는 문구를 집어넣었다―난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절벽에서 새끼 사자를 떨어뜨리는 식의(실제로 사자가 그런다는 말이 아니라) 터프한 선생보다는 따뜻하면서도 섬세한 감수성으로 학생들을 감싸줄 선생이 각광받는 시대가 된 것 같다.

교수들에게 배포되는 대학 캠퍼스의 성희롱 방지 팜플렛에도 여학생들이 대학 생활에서 일말의 불쾌감을 느낄, 그래서 그들의 예민한 감수성에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행동들을 사전 차단하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예컨대, 군대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하라든지―추측컨대 아마도 여성을 소외시키기 때문에?―, 어깨를 두드리는 행위도 성적인 수치심을 유발하니 해선 안된다든지 등등. 또 수업 운영에 있어서도 내향적 학생이 상처입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외향적인 학생들이 토론의 주도권을 잡는 것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지침도 눈에 띈다.

다 일리가 있는 얘기들이라고 본다. 우리는 우리의 젊은 세대를 보듬어주고 보호해주고 위해줘야 한다. 나는 아버지로서 내 딸들을 당연히 그렇게 대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내 몸보다 더 사랑하는 내 딸들을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상처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망상을 품고 살지는 않는다. 예컨대 폭력과 성추행과 같은 심각한 위해로부터 내 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짓이든지 할 것이다(글세, 상상이긴 하지만, 가해자를 죽이는 짓까지도?―무지막지한 폭력영화 '테이큰'이 히트친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인생 살이의 수많은 사소한 위해들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교육적으로도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내딸들은 그런 사소한 위해들을 직접 겪고, 아픔을 느끼고, 상처도 받고, 그리고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극복하며 어른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딸들을 키우는 궁극의 목표는 그들의 보호에 있지 않고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

그래서 요즘 대학생들을 대하는 교육계의 풍토에 나는 다소 못마땅해 하고 있다. 교수가 여학생을 성추행한다면 당연히 형사처벌해야 한다―교수직 박탈은 말할 것도 없고. 교수의 여학생에 대한 노골적인 성희롱적 언사도 처벌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교수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범하는 작은 실례, 무례 등으로부터 여학생들을 완전히 보호하려는 의도는 비인간적이고 실행 불가능하며, 궁극적으로 비교육적이기까지 하다. 어느 정도의 마음의 상처는 겪고, 극복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어떻게 세상의 모든 불쾌한 인간적 조우의 모든 가능성을 사전 차단할 수 있겠나. 또, 그런 것들을 사전 차단한다는 것은 학생들을 온실(사회라는 외부 환경 차원과 개인적 내면 세계 차원 양자에서) 속의 화초로 만들 위험 소지가 있다.

나는 외향적 성격의 학생이 수업 중의 토론을 이끄는 것을 제지하지 않는다. 단, 너무 독주할 경우에만 내가 개입하여 발언권을 분산시킬 뿐이다. 나의 외향적 발언자에 대한 방관적 태도가 내향적 학생들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리 믿는 것은, 나 자신이 지극히 내향적인 인간이고, 젊은 시절에 수업의 토론에 참여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인간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나의 타고 난 성격은 결코 좋거나 나쁘다고 평가할 것이 못되지만,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개선해줄 필요가 분명히 있다. 난 내가 강의실의 토론이라는 어려운 자극을 감내하며 내 성격의 한 면모를 겨우 겨우 극복하며 성장할 수 있었듯이, 나의 내향적인 젊은 학생들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극을 주는 외향적 학생들의 발언을 함부로 제지하지 않는다. 다만 기다릴 뿐이다, 타학생들의 발언 독점에 자극받아 조용한 저 학생도 언젠가는 한마디 발언을 해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즉, 나는 내향적인 학생들에게 '너희도 있는 그대로 훌륭해, 너 자체로 사랑해줄게'라는 식보다는 '너희는 더 훌륭해질 수 있어, 한 번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봐!'라는 태도를 견지한다고 하겠다.

한편, 교육자들은 자신의 언설에 대해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여성의 외모, 남성의 신장 등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완전히 다무는 편이 낫다는 것이 나의 십여 년 대학 강단 경험의 결론이기도 하다―비록 못된 장난꾸러기 기질이 다분한 나로선 이게 마음에 안 들지만. 그밖의 여러 개인적 특성을 비하할 수 있을 언행도 당연히 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수들이 '하지 말아야 할 언행들' 의 긴 리스트에 담긴 많은 조항들은 교수자의 자유와 자발성, 그리고 선의까지도 지나치게 옥죈다고 느낀다. 예컨대, 앞으로 나는 여학생들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일은 께름직해 할 것 같다. 아니, 여학생들 앞에서는 아예 내 손을 뒤로 묶어 버려야 될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간 여학생이건 남학생이건, 그들이 진정으로 기특하거나, 안쓰럽거나, 또는 귀여워서―아들, 딸처럼 말이다!― 어깨를 토닥였던 적이 드물게 있었거늘... 또, 이따금 길에서 마주치면 반가워서 손을 내미는 여제자들과 악수할 때에도 괜스레 어색할 것 같다.

그러나 난 선생인 내 일에 충실하고자 나름대로 나 자신을 바치며 사는 한 교육자로서 이같은 나의 소심함을 극복하기로 선택한다. 그래서 여학생들에게 군대 이야기도 하고, 때론 그들의 어깨도 토닥여주고, 내게 악수를 청하는 제자들의 손을 반갑게 맞잡아 줄 것이다. 교수가 '하지 말아야 할 언행들'의 리스트에는 여학생이 남자 교수의 연구실에 상담차 찾아왔을 경우 연구실 문을 반쯤 열어놓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써있다. 아니, 난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를 신뢰하고 존경하여 연구실까지 찾아온 여학생의 마음을 생각하여 그의 사생활을 보호해주고 그의 말에 집중하기 위하여 연구실 문을 꽉 닫아버릴 것이다.

학생들에게 불쾌감을 줄 교수의 언행을 사전 차단함으로써 젊은 학생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을 방지하는 것, 아니면 나와 같은 선의의 선생―뻔뻔한 말이지만―이 학생들과 격의 없이 '사귀고' 놀도록 놓아두는 것, 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이 사회를 위해, 또는 학생들의 성장을 위해 더 이득이 될까? 나 개인으로서는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내 생긴 꼴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다. 학생들로서도 작은 상처들은 입어보고 견뎌내야 더 씩씩하게 크지 않겠나.

허나 물론 세상은 이같은 나의 선택의 변 한 가지로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다단하지 않은가. 교수자의 존재가 그의 행동에 우선해야 한다는 건 이상적 원론에 그친다. 며칠 전, 평생 존재를 갈고 닦은 원로 불승이 젊은 여신도를 성추행했다는 추문에 휩싸였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세상이다 보니 최고의 지성인 대학 교수들에게까지 유치원생에게 그러듯이 '올바른 행동의 리스트' 따위가 배포되는 것 아니겠는가.

세상의 모든 '지침'과 '수칙'들처럼 덧없는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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