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그리고 의인의 죽음 (2012/1/17)
©
Suk Hoon Han
새해가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나, 내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정치가 중의 한 사람인 김근태가
죽었다.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기에 잘
안보는 조선일보를 열어봤다. 다음은 그 인터뷰 내용이다.
問:
1995년
여주교도소 복역 중에 김 전 장관과 만나 사죄한 것이 가식적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김
장관과 만났을 때 '죄송합니다. 면목없습니다' 그랬더니 딱 끌어안으면서
'그게 개인의 잘못입니까? 시대가 만든 것이지, 저도 그만한 아량은
있습니다'라고 하더라. 평생 잊지 못한다. 참 소중한 기억이다."
問:
고문
피해자들의 심정을 생각해 본 적 있나.
"그래서
평생 한을 지고 살고 있다. 내가 고문했던 것들이 괴롭지 않으면 목사가
되었겠나. 젊은 혈기에 상사가 시키는 일이 애국인 줄 알고 물불 모르고
했던 결과가 이제 송두리째 내가 안고 가는 멍에가 됐다. 그 수모를
내 가족이 함께 받아서 너무 고통스럽다. 둘째 아들은 심장마비로 죽었고,
셋째 아들은 재작년에 막노동을 하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셋째 아들은 내가 고문기술자라고 낙인찍히자 대학도 그만두고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지금은 아내가 폐지를 주워서 생활하고 있다." (2012.1.12. 조선닷컴)
두
사람은 현세의 악연을 다 씻은 것일까. 비참한 노년을 버티며 살고 있을
이근안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상상하기가 괴롭다. 원수를 용서한
김근태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상상이 가능하고, 상상하기가 평화롭다.
나는 누군가에게 고문을 당해본 적은 없지만, 나를 죽일 듯이 증오했던
적, 일종의 원수 같은 자를 용서해본 적이 있다. 나에게 용서할 수 있었음은
기적이었고, 그건 신의 큰 은총이었다.
십년 쯤 전에 혼신의
정성으로 읽던 '신과
나눈 이야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은 모두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영계에서
타 영혼들과 약속을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태어나면 서로에게 이러저러한
상대가 돼주자고. 그래서 어떤 영혼은 자신을 죽도록 때리는 악역을
맡아주기로 약속해주는데, 그런 역할을 맡아준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깊은 사랑의 표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그 약속들은
완전히 망각해버리고, 그래서 이 생에서 자신을 핍박하는 적을 한없이
증오하지만, 우리가 이 생에서 이뤄야 할 일은, 결국 그 적을, 원수도
나와 똑같은 영혼임을 깨닫고 용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신화로 믿건, 비유적 스토리로 간주하건, 또는 그저 그럴 듯한
지혜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건 간에,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고, 이 이야기의
정체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이 이야기가 내 가슴속의 어떤 부분과
공명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김근태와 이근안과 같은 지독한 악연이라면
모르겠지만, 나처럼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사는 사람이 세상사에서 겪는
소소한 인연들 중에 용서 못 할 상대란 없다. 나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용서한다.
그러나 김근태의 용서는 나와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 고문의 병마로 몸은 스러져갔지만, 그는 자신의 고귀한 태도로
세상에 큰 은덕을 베풀고 갔다. 원수를 용서함으로써 인간 정신이 자유로울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줬고, 가장 더러운 물인 정치판에서 기품과 양심과
절개를 지킴으로써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희망의 단서를 나눠주었다.
김근태와 이근안이 영계에서 약속을 했다면, 그들은 약속을 잘 지켰고,
그래서 이번 생에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을까? 뭐, 그것까지는
나는 모르겠다.
용서하고, 놓아준다는 것은 자유롭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사람은 타인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가 나에게 한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용서할 수는 있다. 어떻게? 삶에 혼신을 바침으로써.
그것이 내가 지금 여기에 숨쉬고 있는 영적인 이유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음으로써.
언제나 쉽게 잊어버리는 귀중한 초심. 그 수행의
초심을 올 한 해도 자꾸만 기억해내며 열심히 살아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