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하루

가을의 바쁜 하루 (2013/10/6)

지난 금요일은 요즘 들어서 가장 바쁜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 수업이 있는 서강대를 향해 집을 나섰는데, 가면서 전철 속에서 생각해보니 간밤에 수업 준비물 한 가지를 빼먹은 것이었다. 학생들의 의견을 익명으로 취합하기 위한 투표 용지 만드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다행히 수업 시작 전에 조교에게 가위를 가져다 달래서 수첩의 종이를 잘라 부랴부랴 만들 수 있었다. 나는 기본이 외향적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외향적으로 이끌 수밖에 없는 강의라는 활동을 위하여 사전에 나 자신을 차분히 준비시켜 놓아야 한다. 그 준비가 흐트러지면 강의도 흐트러진다. 다행히 오전의 수업은 그럭저럭 잘 진행됐다. 교직을 선택하는 여러 현실적, 개인적, 이상주의적 동기들에 관해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학생들은 집중해줬고, 의미있는 견해들을 많이 쏟아내줬다. 다소 미흡했던 준비에도 불구하고 일단 하루의 첫 단추는 성공적으로 끼웠다고 할 수 있다. 신께 감사.

수업 하나를 마치면 에너지가 고갈돼버리는 나는 바로 양기를 보충해줘야 한다. 학교 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꾸역꾸역 먹었다. 나는 밥심으로 강의하는 것 같다. 식후엔 바로 강북의 다른 대학으로 향했다. 이번 학기에는 이 대학에서 맡은 강좌가 없지만, 이전에 내 수업을 들은 대학원생들의 학위 시험 채점 건이 있어서다. 서울에서 이곳, 저곳을 전철과 버스를 이용하여 오가노라면 평균적으로 한 시간은 소요된다.

몇 달 만에 와보는 대학 캠퍼스는 왠지 분위기가 안 좋게 느껴졌다. 버스에서 마구 밀치고 내리는 학생들 덕분에 내 안에 편견이 만들어졌나 보다. 게다가 대자보 게시판을 보니, 학생들의 수업 태도가 불량하여 교수들이 공식 행동을 취했으며 이에 대해 학생들이 반발하는 등, 아름답지 못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에구, 내가 몇 달 안왔다고 이렇게 분위기가 황폐해지다니, 쯧쯧.

학교의 구내 커피점에서 2천원 짜리 아메리카노 한 잔 사마시고 시험지 채점을 마치니 3시가 가까워 온다. 일 다 마쳤으니 집에 가면 되겠지만, 이 날은 저녁에 서울에서 일정이 하나 더 남아있어서 경기도의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강사실에나 들어가서 책 읽고 공부할까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 너무 소란스러웠다. 가을 날 오후의 황금같은 3시간이 내게 주어졌는데, 이걸 과연 어떻게 써야 후회스럽지 않을까 고민 끝에, 그냥 혼자 놀기로 했다. 강사실의 컴퓨터로 지도와 버스 노선 등 정보를 수집한 뒤 캠퍼스를 떠나 서울 도심으로 향했다.

내가 향한 곳은 창경궁이다. 45년 전, 내가 유아기를 보낸 외가가 바로 창경궁 앞 원남동에 있었다. 수단이 좋으셔서 당시의 '창경원'을 무료로 출입하실 수 있었던 외할머니께서는 맨날 나를 데리고 창경궁에 가셨고, 그 너른 궁터가 다 나의 놀이터였다. 당시엔 그곳이 동물원이었고, 일제가 심어놓은 벚꽃나무가 즐비하게 서있었다. 수정궁이라는 음식점 앞의 연못을 가로지르는 케이블카도 있었다. 한마디로 서울 시내의 대표적 유원지/놀이동산이었다. 궁의 한쪽 구석 호젓한 언덕에는 사슴 우리가 있었고, 나는 그곳의 사슴들을 쓰다듬으며 놀기를 좋아했다. 그랬던 곳에 오랜만에 가봤다. 가을날은 청명했고, 궁은 한적했다. 나무와 햇살을 바라보며 숲속의 벤치에 오래 앉아있었다. 유아기의 추억을 수집하는 것이 다음 번 쓸 책의 주된 과정이기에, 나로선 창경궁 방문이 필요하기도 했다.

사람이 대개 어릴 적에는 동물에 관심이 많다가, 중년을 거쳐 나이를 먹게 되면 식물에 관심이 많아진다. 그건 자신의 내적 에너지가 식물의 그것을 닮아가기 때문이 아닐런지. 또 더 나이를 먹으면 아예 광물에까지 관심이 연장된다. 그래서 노인들이 수석을 완상하는 것이다. 나도 돌에 흥미가 생겼다. 늙어가는 증거이겠다. 반갑지 않은 현상으로 간주해야 하는 건지... 지난 여름에 둘째 딸과 동해시의 성류동굴을 본 이래로, 암석과 지반과 지구 전체를 하나의 꿈틀거리는 생명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단단한 바위도 자라고 늙고 소멸한다. 단지 그 속도를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다. 우주 만물을 인간과 동일시하는 상상이 가능했던 고대의 철인들이 깊은 사색 속에서 궁극적 실재를 흘낏 엿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고즈넉한 가을 오후의 고궁 속을 거닐면서 나무와 돌을 감상하며 깊은 사색에 빠져볼까 했으나, 결정적으로 나의 왕성한 위장이 나를 배신했다. 점심을 잔뜩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서녁에 걸리자 어김없이 허기가 엄습해오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바로 옆의 대학에 교수로 있는 벗을 주점으로 불러내서 배도 채우고 술잔도 나누고 싶지만 가야 할 곳이 있어 그럴 수도 없다. 1호선 전철을 타야 하기에 종로 쪽으로 발길을 돌려 창경궁을 나섰다. 예전에 오가던 창경궁과 종묘를 이어주는 구름다리가 아쉽게도 폐쇄돼서 종묘는 구경하지 못했다. 종로의 한 식당에 들어가 배를 채우고 전철에 몸을 실었다.

내가 하차한 곳은 또 다시 나의 유년기와 아동기를 보낸 곳, 노량진이다.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노선이 그렇게 돼버렸다. 노량진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갈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저녁의 마지막 목적지는 관악구의 '나눔의 집'으로, 지난 여름에 지역주민 대상의 인문학 강좌를 두 달간 맡았던 곳이다. 내 강의를 들었던 수강생들의 졸업식에 초대받은 것이다. 한 여름에 헤어졌던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과 재회하니 반가웠다. 축사도 한마디 했다. 무엇보다,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배움을 향한 귀한 불씨를 찾아낸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들이 고마웠고 감동스러웠다. 하루에 두 편씩 시를 쓴다는 한 아저씨가 핸드폰에 적은 자신의 시 한 수를 보여줬다. 그의 유년기가 담긴 머나먼 남쪽의 바닷가, 변화한 세상, 서울의 삶, 공장 일과 웨이터 일 등의 돈벌이, 중년기의 애잔한 회상 등이 솔직하게 담겨있는 시였다. 나는 그 시를 세 번쯤 읽고, 다음에 막걸리 마실 때 나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 아저씨들과 아줌마들과 막걸리 한 잔 나누고 싶다. 그곳 분들은 내게 고맙다 했지만, 나는 그분들이 고마웠다.

밤 10시가 다 돼가는 귀갓길, 몸도 슬슬 피곤해오는데, 갑자기 친구가 중간 지점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웬일인지 의아해 하며 10시가 넘어서 사당역의 호프집에서 친구와 마주 앉았다. 이미 전작이 있었던 벗은 삶의 고충을 내 앞에서 털어놓았다. 맞장구도 쳐줬다가, 구박도 해가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생사에 정답이 있겠는가. 자기의 최상을 드러내어 부딛쳐볼 밖에. 계속 맥주를 마시려는 벗을 뜯어말려 술자리를 파한 뒤 집으로 향했다. 버스에 서서 흔들리다가 귀가하니 자정이 됐다. 몸을 씻고 잡다한 정리를 하고 한 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나의 하루는 꿈속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자기성찰과 집필을 동시에 진행하는 이즈음에 꿈 분석에 열을 올리다보니, 갈수록 더 많은 꿈을 꾸는 것 같다. 이날 밤의 꿈 한 편에서, 요즘 출강하게 된 한 대학의 후문밖에 내가 서있었다. 나를 그 대학으로 부른 교수님의 차가 후문 앞에 서있는 모습이 보이고, 나에게 그 차에 함께 타서 학교 안으로 들어가자는 신호가 오지만 나는 함께 타지 않겠다고 화답한다. 그리고는 내 차를 학교 밖 주택가에 주차하려 하는데, 주차 공간이 매우 협소하다. 간신히 한 곳을 잡아 차를 세웠는데, 갑자기 내 차가 두 대가 된다. 그래서 또 한 대를 주차하기 위해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앞에서 다른 차가 진입하여 진퇴양난이다. 그때 이미 주차시켰던 다른 내 차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해서 내가 깜짝 놀란다. 앞에서 다가오던 다른 차 안에는 외국인 남성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그는 나의 차 두 대가 좁은 길을 막았음에도 친절한 미소로 참을성있게 기다려준다. 다행히 나의 다른 차가 길을 양보해줘서 그 외국인은 빠져나갈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지 않은 또 다른 내 차가 제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나는 혼자 움직이는 그 차의 창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운전대를 꽉 잡고서, 차 밖에서 그 차를 통제해보려 하나 매우 어렵다. 결과적으로 두 대의 차를 좁은 주택가에 주차시켜야 하는데, 집집마다 문앞에 화분과 돌을 놓아두어 주차할 공간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어렵게 공간을 발견하여 두 대를 다 세울 수 있었다.

전술한 그 대학에 실제로는 후문이 없다. 그 교수님이 내게 동승하여 후문으로 들어가자고 제의한 것은 비공식적인 경로(비리나 부정이 아님)를 통해 내가 그 대학에 자리를 잡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공식적 경로로 일반적 교수의 커리어 트랙에 들어가기를 실제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꿈에서도 나는 그 교수님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 맘대로 아무데나 주차하려 한다. 그러나 당연히 자리를 잡기가 어렵다. 때로 조우하게 되는 선의의 합리적인 이들(외국인 운전자)은 나를 이해해주고 배려해주기도 하지만, 여전히 두 종류의 커리어(즉, 교육자이자 작가 = 두 대의 차)를 안착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작가의 커리어는 제멋대로 틀어져 버리기도 한다. 꿈속에서 내 감정은 계속 어려움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다지 부정적인 정서를 동반하지는 않고 있다. 아마 당분간은 이런 어려운 주차 과정을 지속해야 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떤 대학의 정식 일원이 될 마음이 없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머리맡의 메모지에 이 꿈의 내용을 휘갈겨 써놓고 다시 잠이 들었다. 요음 들어서 가장 바쁜 하루였다.

'수행일상 2013'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