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데미안 (2013/3/2)

내가 십대 후반에 마음속에 새겼던 미래의 계획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상의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가이드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나 자신의 성장의 고통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계획을 꿈꿨을 당시에 나의 구체적 참고서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그리고 삼십여 년이 지났다. 그간 나는 공부를 했고 내 안의 심층을 들여다봤으며 젊은이들을 가르쳤는데, 이제는 십대 때의 그 계획을 집중적으로 실행할 구체적 단계에 이르게 됐다. 지금까지는 교육철학과 교육학 분야 전반을 강의하고 글을 썼지만, 이번 학기부터는 내가 만든 독자적 교육과정인 일종의 '대학생을 위한 자아실현 프로그램'을 한 대학에서 맡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겨울방학 동안 데미안을 삼십여 년 만에 다시 집어들어 읽었다.

다시 읽다보니, 내가 책 내용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완전히 잊어버렸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지만, 동시에 책의 핵심 메시지를 삼십 년 넘도록 명징하게 가슴에 새겨두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도 있었다. 위대한 책은 그처럼 인간 내면에 강력한 영향력을 항구적으로 행사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점은, 소년기에 읽었을 때엔 수수께끼 같아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아주 많았었는데, 이제 읽으니 책 내용의 거의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고, 헤세가 써넣은 문장 하나, 하나가 왜 그렇게 씌어져서 거기에 박혀있는지 공감이 간다는 사실이라 하겠다. 데미안이라는 명저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 삼십 년이 걸린 셈이다. 하여, 오늘은 이 책의 주요 구절들 몇 수를 옮겨놓으려 한다. 고전의 이해를 위해서는 머리뿐 아니라 삶의 경험이 필요하다. 내가 그간 공부한 세상의 사상과 사조들 중에서도 특히 머리보다 삶의 경험이 절실한 전제 조건으로 요청되는 것이 C.G. 융의 분석심리학이었다. 데미안은 융이라는 코드로 풀어나갈 때 완전히 독해 가능하였다. 무엇이 나를 데미안에게 인도하였고, 마침내 융에게 이끌어왔을까. (헤르만 헤세 저, 전영애 역, 데미안, 민음사, 2000).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7쪽)

韓: 나는 십대부터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고, 그것은 참으로 어려웠으며, 여전히 그것을 살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9)

韓: 융의 '개성화(individuation)' 또는 '자기실현'을 잘 설명한 말이다.

모두가[= 모든 사람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9)

韓: 루소와 니체와 융이 한데 녹아있는 말이다.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 (116)

韓: 바꿔 말해, 내면의 신성, 심층의 자기(自己; the Self)가 바로 그 "사람"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123)

韓: 알을 깨고 나온 이만이 신에게로 날아갈 수가 있다. 나를 가둬 놓고 있는 알은 무엇인가?

바깥 세계가 몰락한다 하여도 우리들 중 하나는, 그 세계를 다시 세울 능력이 있다. (141)

韓: 왜냐하면 내 안에 우주의 모든 것이, 신이 깃들어있기 때문에.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인식.....

자신을 남들과 비교해서는 안돼, 자연이 자네를 박쥐로 만들어놓았다면,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돼. (147)

韓: 자신이 박쥐로 태어났음을 깨달았으면, 가능하면 완전한 박쥐가 돼라! 세상은 박쥐를 손가락질 하지만, 허나 세상이여, 흑과 백을 넘나들며 양자의 변증법적 통합을 꿈꾸는 박쥐 없이 어찌 세상이 돌아갈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무서워해선 안 되고 영혼이 우리들 마음속에서 소망하는 그 무엇도 금지되었다고 해서는 안 되지. (151)

韓: 신에게로 날아가기 위해서 내가 깨야 할 알 중에는 인습, 금기, 계율, 윤리관 등이 포함돼있다.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171)

韓: '해야 할 것'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한다. 그것이 참된 나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난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자신의 운명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 그에게는 그때부터는 자기 비슷한 사람이 없어. 완전히 홀로 서 있지. 주위에는 오직 차가운 우주뿐이지. (173-174)

韓: '개성화' 또는 자기실현의 길은 고독하다. 진정한 고독에 이르기 전에 너무 서둘러 연대(solidarity)를 좇는 것을 경계할 일이다.

우리의 과제는 세계 안에서 하나의 섬을 제시하는 것, 어쩌면 하나의 모범을, 아무튼 살아가는 다른 가능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193-194)

韓: 자기실현의 구도자에게 의무 따위는 없다고 했으나 스스로 만든 과제가 있다.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넘치는 만족과 쾌적함 속에서 숨쉬도록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고통과 쫓김이 필요했다. (210-211).

韓: 지금의 고통과 쫓김도 다 그럴 만 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주어진 것들이다. '이유'에는 원인과 목적 양자가 포함된다. 그런 이유들을 납득하고 수용하기 위한 용맹정진의 노력 없이 섣불리 '매사에 감사한다'며 자신을 속이지 말라.

쏘크라테스 싸부께서 이르셨듯이, 평탄한 삶은 인간에게 적합한 삶이 아니다.

'수행일상 2013'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