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여행 (2013/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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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나는
기차 여행을 정말로 좋아한다. 특히 너른 창가 자리에 혼자 앉아 가는
것이 최고다. 아직껏 누군가와 파트너로 함께 동석하여 간 기차 여행이
나 홀로 기차 여행보다 더 재미났던 경험이 없었다. 지난 주에 경주를
다녀올 때도 신났다. 기차가 도시를 빠져나가 산천경계로 넘어갈 때에는
짜릿한 감흥마저 느낀다. 산과 들을 달릴 때에는 그저 차창 밖을 바라만
보고 있으면 좋다. 왜 그리 좋은지 나도 모르겠다. 분석심리학적으로
볼 때에는 내향적 감각형 인간이 이러하다고 하는데, 내가 그런 인간인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다만 KTX는 너무 빠른데다 좌석이 비좁아 불편하다.
KTX 특실 좌석은 널찍하다지만, 비용이 과도하게 든다. 시간 여유만
있다면 새마을호나 무궁화호가 더 편하고 좋다. 철도망은 일본이 극도로
발달돼있어서, 일본에 가서 기차 여행을 한 번 해보고 싶기도 하다.
허나, 지금 내 사정으로는 요원한 희망일 뿐이다.
경주에 가서는
정신의학자들의 큰 행사에 초청받아 '특강'을 했다. 나같은 '듣보잡'에게
웬만해서는 주어질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경험이다. 학연, 혈연, 지연
중 아무 연결도 없음에도 나를 영광스러운 자리에 불러주시는 분들은
신기한 사람들이다. 그런 분들이 물론 고맙지만, 어쩌면 현상계 너머의
어떤 은혜로운 힘이 작용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해드린
것도 없는데 자꾸만 내게 온갖 것을 베풀어주시는 분들을 보면 고맙다
못해 감격스러워지기까지 한다. 어떻게든 은혜를 되갚고 싶은 내 심정도
서울 깍쟁이의 '더치 페이'적 계산심리에 불과할 것이 우려스러워, 일부러
빨리 되갚지 않으려 한다. 이 각박한 세상 속에 그런 사람들을 여럿
알고 지낸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경주 행사 후 베풀어진 주연(酒宴)에서
존경하는 철학자적 정신의학자께서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바이블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어여쁨을 받은 이유가 그가
참된 자기를 찾아 자기실현의 험한 여정을 떠났기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크게 공감됐다. 위험한 '길 떠나기'를 아예 못하고 집에 남아있던 착한
아들보다 '탕자'가 더 훌륭한 아들인 것이다. 나도 '아버지' 신께서
용감히 길 떠나보라 권유해주신 지 십수 년이 흘렀는데, 그렇다면 나는
충분히 어여쁨을 받을 만한 탕자가 돼가고 있는 걸까? 흐흐, 탕자가
돼야 하느니라. 어쨌든 이날은 최근 수 년 동안 가장 술을 많이 마신
날이 됐다. 딱히 탕자가 되려 한 건 아니었건만... 철학자-정신의학자
선생님은 내가 공부하고 있는 융을 뛰어넘는 사상가로 레비 스트로스를
추천하셨다. 그러고 보니 지난 몇 년간 레비 스트로스의 후예의 신화학
책 시리즈를 다섯 권 읽었다. 술이 깨고 기차 타고 집으로 돌아와 책장을 뒤져보니,
삼십 년 전에 미국 중고책방에서 사둔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가
아직도 있다. 그걸 바로 읽기 시작했다.
돈도 잘 못 버는데,
공부만 점점 더 재밌어진다. KTX 특실 탈 만큼 벌어봐야겠다.
